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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부 혹은 제3인 것, <그랜드 투어>

<그랜드 투어>를 곱씹으며 어쩐지 자연스럽게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떠올렸다. 아즈마가 특히 강조하는 개념인 ‘오배’는 전송의 오류를 뜻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실상 관광객에게는 필수적이며 도리어 긍정적인 측면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가령 나의 근처라면 기웃거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을 곳을, 관광지에서는 필수로 방문하게 되는 역설 말이다. 오배의 경험은 오히려 단절되어 있던 역사에 관광객들의 산발적인 체험과 시선을 개입시킨다. 여행은 그러한 불확정성과 손을 잡음으로써 연대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행위일 테다.

그러나 아무리 미시적 차원에서 발휘되는 여행의 효과를 긍정하더라도, 제국의 식민지 건설이 촉발한 관광의 포화가 낯선 땅에서의 고유한 미적 체험이나 미지와의 조우를 통한 성찰적 여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그랜드 투어>가 드러내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랜드 투어는 제국의 (감각적, 문화적) 우월성을 재확인하려는 의도에서 식민주의의 향유를 일상적 실천으로 전개한 정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제시하는 관찰의 테마, 아시아 국가들의 ‘위계 없는’ 나열, 이따금 그들의 언어로 전개되는 내레이션이나 불통과 착오의 상황 등이 이국을 주변화하는 재현 방식이라고 꼬집어 지적하기도 어렵다. 미겔 고메스 영화의 목표는 이종 배합을 통한 ‘불순물’의 정치를 감각화하는 데 있으며, 도리어 이 영화의 불온하리만치 이그조틱한, ‘대상’으로서의 동양에 대한 재현은 타자가 유럽의 시선을 통해 (재)배치될 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겨냥하는(다소 고약한) 농담에 가깝다.

제3의 존재양식

차라리 관광객이라는 위치에서 우리가 역점을 두고 봐야 할 것은 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집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집이 없는 이들에게 여행은 여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서문에서 본인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그리고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대별한다. 그가 되짚은 운하임리히의 상태란 언캐니(uncanny)하고는 달라서 언홈리(unhomely)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집 같지 않은 느낌’을 의미하는 운하임리히는 익숙함과 낯섦의 결합에서 주체가 느끼는 내밀한 불안과 연관된다. (이 논의에서 피셔가 더 주목하는 것은 실상 운하임리히로 눙쳐진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세부적 차원이지만, 여하간)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 제국이 오히려 식민지에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통제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 허상에 불과할 때의 은밀한 공포이다. <그랜드 투어>의 인물들은 일견 관광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사실 아무리 국경을 넘더라도 궁극적인 환희는 약속되어 있지 않으며- 환속을 희구하던 사제의 퇴장을 생각해보자- 그러므로 끊임없이 국가를 옮겨다녀야 한다.

그런데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은, 집 같지 않음을 느끼기 위해서 실상 존재론적으로는 주체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집의 외설성 혹은 허구성을 의식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모순으로 지각하기 위해서 주체는 모순의 안쪽에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내부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구체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행자는 근대적 개인이 느끼는 운하임리히를 체화하는 동시에 흩트러뜨리는 패러독스적 존재다. 왜냐하면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앞서 말했듯 집이 있어야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 돌입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집을 단일하게 확정하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행자에게 집은 어디인가? 그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향의 집인가? 아니면 관광지에서의 노곤함을 달래줄 숙소인가? 아니라면 나의 방이자 부엌과 침실까지 제공하는 이동수단인가? 나아가 나-여행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그는, 다시 아즈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과 ‘밖’도 아닌 제3의 존재양식”으로 부유하는 셈이다.

<그랜드 투어>에서 열차는 탈선하고 배는 전복한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지도대로 이끌리는 법이 없고 밀항이나 휴양을 거듭한다. 무엇보다 방점은 인물들이 여러 국가를 거쳐간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 반복된 여행에 내재된 영속성에 찍힌다. 왜 에드워드는 계속 도망가는가, 왜 몰리는 계속 좇아가는가. 그러니까 왜 이들은 만나지 못하는가? 왜 이 여행은 끝나지 않는가? 그러니 이는 곧 시간의 문제다. 원래 여행의 시간이란 우연성과 개방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일시적이다. 찍고 돌아와야 그 시간을 의미화할 수 있다. 그런데 에드워드와 몰리에게 여행 가능한 선택지는 무수하며, 집(자국)이 아닌 장소들은 쉼 없이 대체될 수 있으므로 귀환은 유보된다.

두개와 그 사이

<그랜드 투어>의 시간은 공간만큼이나 단정할 수 없다. 도입부에서 1918년을 제시하지만, 정작 우리가 따라가는 여행에서 이 시간은 거의 무화된다. 가령 여행을 통해 발견되는 아시아의 모습은 20세기와 동시대가 뒤섞인 풍경이다. 일례로 에드워드가 필리핀에 도착했다는 내레이션이 흐를 때 화면에는 가라오케 기계로 (1969년 발매된)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를 열창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혹은 중국을 방문한 이야기와 함께 우리가 보는 것은 누가 봐도 코로나19 유행 시기 혹은 그 직후 촬영했음이 분명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다. 음성은 화면의 증거가 되지 못하며 시간은 공간의 토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여행은 정말 언제 끝날까.

그건 물론 인물들이 멈출 때이다. 1부와 2부는 각각 에드워드의 수면과 몰리의 사망으로 마친다. 죽음은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던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삶의 끝이란 주체가 경험하지만 증빙할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이다. 우리를 채우는 건 오로지 그 사이의 여정뿐이다. 마치 모리스 블랑쇼의 <죽음의 선고>가 한 여자 J의 죽음(과 환생)을 다룬 1부와 그 여자의 죽음 이후를 다룬 2부로 이뤄지듯 삶은 죽음의 유예이거나 그것의 무한한 복제다. 몰리의 여행은 에드워드의 여행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마치 평행하는 반복(A’)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동일함의 재연이 아니다. 이는 잠든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만큼 큰데, 영화는 잠든 이를 깨지 않게 둘 수 있고 죽은 이를 일으켜 살릴 수도 있다.그러니 어떤 점에서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는, 완결을 유예한다는 의미에서 2(라는 형식)일지도 모르겠다.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의미를 갱신할 수 있고, 미정(未定)의 지점이 잔존하는 상태. 한편 무언가 둘이라는 사실은 그 사이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긴장을 낳으므로, ‘둘로 나뉜 영화’인 <타부>를 지나 도망과 추적의 ‘2부’인 <그랜드 투어>는 이렇듯 역설적인 복수형으로 성립한다. 여행자란 언제나 양가적이면서도 그 이중성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모호한 처지이며 이는 유일한 의미로 고정되길 거부하는 영화의 요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