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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인서트 숏] 감금

언제부턴가 폐사와 살처분이라는 키워드를 알림 설정해두고 뉴스를 받아보고 있다. 동물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괴롭지만, 무뎌지기도 싫은 거다. 특히 겨울이 되면 특정 시기에는 거의 매일 축사에 화재가 났다는 알림이 뜬다. 돼지는 수백에서 수천, 닭은 수만에서 수십만, 병아리는 수백만 마리까지 ‘폐사’했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어떻게 이걸 참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또 화재로 수백 마리의 돼지가 폐사했다는 알림이 뜬 어느 날, 나는 불현듯 직접 찾아가보자는 충동이 들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기도 했지만 혹시 현장을 기록할 수 있다면 이 비극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지만 무작정 근처까지 찾아갔고, 길가에 보이는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불이 난 축사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곳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재가 났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냄새, 색, 기운, 모든 것이. 혹시나 인적이 있을까 조심하며 다가가는데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그런데 외벽을 둘러싼 펜스가 일부 망가져 있는 게 아니겠는가. 소방관들이 진입을 위해 급하게 부순 것 같았다. 커다랗게 뚫린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시커멓게 탄 건물이 보였다. 아니 건물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가설건축물이라 보기에도 몹시 허술해 보이는 양돈장이었다.

이제부터는 뭘 고려할 것도 없이 무조건 찍어야겠다 싶어서 구멍을 넘어갔다. 바깥은 한낮이었지만 내부는 몹시 어두웠고 몇개 안되는 닫힌 창으로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휴대폰 카메라로 보이는 화면은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좀더 밝게 보였다. 이 생각을 하는 찰나 좁은 복도에 몸이 뒤집힌 채 죽어 있는 아주 커다란 돼지가 보였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오자마자 바로 삼켰다. 아마 발버둥치다가 시설 밖으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상상은 했지만, 아니 상상할 겨를도 없었지만 안에 들어가서 본 장면은 너무 참혹했다.

스톨(stall)이라고 부른다. 나 같은 사람은 ‘감금’하는 시설이라고 말하는 돼지 사육시설을 부르는 말이다. 양돈장 입구에 서서 멀리 보이는 끝까지 스톨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위로 드문드문 아주 희미한 빛이 떨어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무언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죽지 않은 돼지가 있는 걸까. 사실 조금은 무서웠다. 그래도 천천히 돼지들 곁으로 다가갔다. 카메라를 들고. 혹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찍겠다. 나, 이 안을 찍어서 나가겠다.

좁은 감금 틀마다 꼭 그만큼의 크기만 한 돼지들이 죽어 있었다. 아까 들리던 끓는 소리는 돼지들의 코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마 영혼은 떠났겠지만 몸 안에서 장기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었겠지. 대부분의 돼지들이 재처럼 시커멓게 탔다. 겨우 귀와 눈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살짝 열린 눈매 사이로 눈동자가 보였다. 아마 어제까지는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따분하고 무료해서 감금 틀의 철근을 씹다가 바로 옆자리의 돼지에게 말도 걸고 짜증이 나면 화도 내고 그러다가 또 의지도 했을 것이다. 이곳에 있던 모든 돼지들은 임신 상태였다. 스톨은 임신한 돼지를 가두는 틀이다. 흔히 모돈이라고 부른다. 평생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가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쓸모를 다하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

왜 이렇게 죽어 있을까. 죽을 때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최대한 한 돼지, 한 돼지를 찍으며 옆으로 이동했다. 어두워서 다음 돼지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슬프고 무서웠다. 그때 바깥의 어딘가 다른 건물에서 살아 있는 돼지의 소리가 들렸다. 양돈장 근처에는 이주노동자들이 숙식하며 지내는 것 같았다. 이제 축산업은 지방이나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문제와도 분리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고려를 하면서도 착취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건 동물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아야 한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은 이런 거다. 어차피 도살될 존재들인데 화재가 나서 죽었다는 건 뭘 의미할까. 나는 이 기록으로 가엾다는 마음 이상의 어떤 문제의식을 던질 수 있을까. 화재와 도살은 얼마나 다를까. 왜 이렇게 돼지를 사육하느냐고 축산업 관계자들에게 화를 내고 말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날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죽은 돼지들은 포클레인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녹아내린 건물은 이미 걷어낸 이후라 양돈장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커멓게 탄 스톨은 사라지고 비교적 덜 훼손된 스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절망감이라는 감정이 찾아왔다. 아, 저기에 다시 돼지들을 채우겠구나.

그날 신었던 운동화에 묻은 그을음은 그 후로 몇번을 세탁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지워지지가 않는다.

돼지들의 모습만큼 잊히지 않을 장면이 하나 있다. 불이 난 양돈장을 찾아가려고 밭일을 하던 한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혹시 오늘 새벽에 화재가 난 양돈장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머리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는 듯 “아휴, 어떡해. 돼지들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울상부터 지었다. 그 말, 그 표정. 난 막연히 사람들이 돼지의 죽음에 대해 ‘우리’만큼 마음 아파하지 않으리라고 여긴 것 같다. 해당 기사에는 늘 인명 피해는 없었다거나 재산 피해액만 강조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시선도 막연히 그러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들은, 아니 대부분의 인간들은 화재가 난 양돈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거기서 죽은 돼지의 얼굴부터 떠올린다는 걸 화재 소식을 몰랐던 할머니가 내 말에 깜짝 놀라고는 이내 슬퍼지던 얼굴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