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임소연의 클로징] AI블루와 파면블루

지난 3월 말부터 SNS를 가득 채운 풍경이 있었다. 챗지피티가 만들어준 지브리 스타일의 사진들. 처음에는 누군가 올린 이미지를 보고 ‘오, 진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네’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어느새 타임라인에 지브리풍 이미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지브리풍의 따뜻한 색감 속에서 사랑스러운 인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대체로 마음에 들어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처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한순간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달 가깝게 이어진 현실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바라보는 지브리 세상은 유독 더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왜 자기 사진을 AI에게 주고 바꿔 달라고 하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브리 스타일을 좋아하는 걸까? 그러다가 질문이 바뀌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른 이들의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가 SNS에 도배되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괴로웠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나는 남들이 AI에게 자신의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로 변환해 달라고 하는 걸 지켜보는 것조차 괴로울까? 나는 왜 새로운 AI 기능이나 서비스가 나올 때마다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이들을 보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이 불편함은 사실 새롭지 않다. 한창 생성형 AI가 만든 젊은 여성 사진 이미지가 SNS를 뒤덮었을 때에도 그랬으니까. AI의 이미지 생성 기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하겠다는 목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젊은 여성의 얼굴과 몸 이미지를 만들고 온라인 공간에 전시하는 이들을 보는 일은 참 불쾌했다. 그들은 실제 여성을 촬영한 사진처럼 보이는 AI 이미지를 만들어놓고는 ‘불쾌한 계곡(언캐니 밸리)’을 극복했다며 “대유쾌”해했는데 그들이 유쾌해할수록, 그들이 찬사를 보낼수록, 나는 더 불쾌했다. 이후 딥페이크 성범죄가 그렇게 전국적인 규모로 벌어져 이 불쾌함의 실체를 확인하게 될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지브리 밈’에 대한 나의 불편함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미 수년 전 AI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을 “삶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거나, 오픈AI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학습에 활용하면서 허가를 받거나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그런데 이게 다일 것 같지 않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가 SNS에 “우리 그래픽처리장치가 녹아내리고 있다”거나 “우리 팀이 자야 하니 이미지 생성을 좀 자제해 달라”라며 호들갑을 떨었다더니 지브리 밈이 퍼졌던 일주일 동안 챗지피티 유료 구독자 수가 450만명 증가했고 생성된 이미지만 7억개가 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다음은 뭘까, 과연 AI와 관련하여 흐뭇하고 기분 좋은 소식을 언젠가는 들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AI에 이렇게 우울한 소리만 하면 어쩌나 마음에 안 드실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개발자이자 테크-페미 활동가인 조경숙과 AI 연구자 한지윤이 함께 쓴 책 <AI블루>다. 부제는 ‘기술에 휩쓸린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들’. 지난 몇달간 그리고 지금도 내란에 휩쓸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마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내란 수괴 대통령의 파면 선고에 기쁨도 잠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지 않고 불안한 이 상태를 ‘파면블루’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AI블루>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귀 기울이고 분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