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내 죽음을 노래하리 - <마리아>와 파블로 라라인의 20세기 여성영화 3부작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전기영화 <마리아>는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첫선을 보인 뒤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드라마 장르 부문,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 부문 후보로 언급됐다. 전기영화 전문 감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마리아 칼라스의 예술적 성취와 비극으로 점철된 <마리아> 이전에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삶을 그린 <재키>,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가 주인공인 <스펜서>를 연출했다. <재키> <스펜서>를 거쳐 <마리아>로 이어지는 파블로 라라인의 여성영화 3부작에 관해 김소희 평론가가 면밀히 분석한 글을 전한다.

<마리아>

재클린 케네디와 다이애나 스펜서,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 파블로 라라인은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 아이콘의 이름을 영화를 통해 되새겨왔다. <재키>가 <스펜서>로 이어질 때 파블로 라라인의 욕망은 분명해 보였다. 재클린 케네디와 다이애나 스펜서는 각각 ‘누군가의 아내’라는 사실이 직업이 되는 특수한 위치에 놓인 인물이자, 독보적인 패션과 존재감으로 시대와 국경을 초월했다. 이에 비할 때 마리아 칼라스는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그 역시 패션의 아이콘이자 오나시스와의 혼외 관계로 화제를 모은 바 있지만, 세계적인 성악가로서의 예술적 존재감이 스캔들을 능가한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할 때, <마리아>는 3부작의 완성이기보다, 이전을 돌아보고 재정립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재키> <스펜서> 그리고 <마리아>

<재키>

실존 인물을 재건하는 데 있어 파블로 라라인은 인물의 전기와 가능한 한 멀어지는 방식을 택해왔다. 그의 영화는 인물의 일대기를 느슨하게 훑는 대신, 인물이 점한 특수한 시간대를 붙든다. <재키>는 존 F. 케네디가 사망한 1963년을 배경으로 삼아, 홀로 남은 재클린 케네디(내털리 포트먼)의 충격과 불안을 가시화한다.

<스펜서>

<스펜서>는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남편 찰스의 외도로 고통받던 시기, 왕실 가족과 별장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전후 3일간을 다이애나의 갈등과 고독을 위한 무대로 삼는다. <마리아>는 마리아 칼라스(앤젤리나 졸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일주일을 담는다. 4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대와 멀어졌던 그는 텅 빈 오페라극장을 오가며 오직 자신을 위한 무대를 준비한다.

<마리아>

인터뷰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를 띤 <재키>처럼 <마리아> 역시 잦은 플래시백을 통해 시간의 한계를 벌충한다. 다만 회고의 범위가 영부인이 된 이후의 시간으로 한정된 <재키>와 달리 <마리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불우했던 10대 시절까지 포함하며 회상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마리아>가 다른 두편에 비해 전기적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다. 두 영화에서 각각 빌리 크루덥과 코디 스밋맥피가 연기한 기자 캐릭터는 인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며 과거 시간대의 개입을 용이하게 한다. 그러나 캐릭터를 묘사하는 두 영화의 방식은 상반된다. <재키>에서 기자는 취재하는 인물이라는 역할에 충실하며, 실존 인물과 실화에 바탕을 두었음을 인식하게 하는 다큐멘터리적인 개입처럼 보였다.

반면 <마리아>의 기자는 실제의 개입이기보다는 마리아가 지속해서 마주하는 환각 내부에 포함된다. 기자의 이름을 마리아가 복용하는 약물의 이름과 동일한 맨드랙스로 설정하면서 그가 환영의 일종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맨드랙스는 주로 파리 회상 장면에서 등장하며, 마리아에게 오나시스와의 관계에 관해 질문한다. 인터뷰 장면은 회상을 감싼 앞뒤에 배치되어 회상과 실제를 명확하게 가르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이다. 인터뷰 장면은 회상으로 빠진 뒤 다시 등장하지 않고 사라지거나, 회상 가운데 불쑥 개입하거나, 회상에서 빠져나오는 출구에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서기도 한다.

<마리아>

빈번한 플래시백은 약물중독과 환영에 시달리는 마리아 칼라스의 두뇌의 비전을 시각화한 결과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플래시백은 마리아 칼라스의 죽음으로 여닫는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회상의 주체가 근본적으로 부재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마리아 칼라스의 기일인 1977년 9월16일을 분명히 새기면서 시작한다. 3부작에서 인물들은 늘 죽음 가까이에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주인공의 죽음을 전면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영화 전체를 실존 인물에 대한 추모에 가깝게 만든다. 배우의 존재가 실존 인물을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추모는 내가 나를 추모하는 것과 유사해진다. 마리아 칼라스로 분한 앤젤리나 졸리가 를 부르는 모습이 담긴 흑백 바스트숏은 자기 죽음을 추모하는 장송곡을 부르는 장면처럼 보이고, 그가 무대의상을 태우는 장면은 자신의 혼을 달래는 의식처럼 보인다.

<재키>

<마리아>의 미묘한 지점은 재현하는 대상이 목소리-존재라는 데 있다. 재클린과 다이애나를 재현하는 데 있어 인물의 외양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인식됐지만, 마리아 칼라스를 재현하는 데는 인물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현하는가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마리아를 연기한 앤젤리나 졸리가 오페라가수를 연기하기 위해 들인 노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에서 실존 인물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은 중요했다. <재키>에서 재클린을 연기한 내털리 포트먼은 발음을 꼭꼭 씹는 대신 흩트리면서 인물 특유의 발성을 모방하는 동시에 자료화면 속 시간대의 거리감을 재현했다. <스펜서>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공기를 가득 담은 발성 역시 그가 다른 누군가의 영혼을 집어삼킨 흔적으로 기능했다.

<스펜서>

반대로 <마리아>에서 앤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노래와 인생을 대하는 꼿꼿한 태도와 표정이 목소리 재현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음을 설득한다. <마리아>를 통해 앞선 두편의 영화 속 이미지-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외양의 복제에서 인물 체화의 차원으로 변경할 수 있다. 체화의 흔적은 인물의 신체를 통과해서 내뱉는 발성을 통해 감지된다. 이를 기준으로 삼을 때, 실존 인물을 재현하는 영화에 관한 판단은 재현의 정밀성에서 한 인물에게 다가가려는 배우의 노력으로 이동한다.

<마리아>

<마리아>에서 앤젤리나 졸리는 건강상 위기 징후가 포착된 시기의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다시 무대에서 노래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목소리는 그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다. 의사는 지금의 몸 상태로 무대에 선다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다시 노래하기 위해 애쓰는 마리아의 시간은 마리아를 연기하는 앤젤리나 졸리가 배역의 목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과 겹친다. 무대 공연에 관한 영화 속 마리아의 코멘트 역시 종종 연기에 관한 코멘트로 들린다. 마리아는 식당에서 전성기의 음성이 담긴 레코드를 재생하자, 이를 멈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완벽했던 과거가 현재를 초라하게 비추기 때문이 아니다. 매번 다르게 불러야 하는 노래가 음반에서는 너무도 완벽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하는 배우를 위한 말로도 유용하다. 실존 인물은 배우에게 완벽한 레코드와 같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인물과 동일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 인물을 재현한다는 건 수많은 실패의 목록 속에 하나의 사례를 보태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완료된 인물의 상을 조금 허물 수 있다면, 인물을 잠시 다시 살게 하는 의미는 충분하다. 마리아 칼라스에 다가가려는 배우 앤젤리나 졸리의 노력은 마리아가 마리아의 목소리에 가닿으려는 시도로 번역되면서 영화 바깥에서 내부를 비추는 서사를 생성한다.

<마리아>

마리아가 피아노 앞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쓸 때, 그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의 노래에는 완벽을 넘어서는 감동이 있다. 그의 가사를 돕는 브루나(알바 로르바케르)가 평가를 요청받았을 때 쓰는 단골 코멘트인 ‘감동적이다’(magnificent)는 말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가장 적확한 평가처럼 보인다. 특히 마리아가 마지막에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삽입곡 <Vissi D’Arte>를 노래할 때, 배우가 내뱉은 진실에 가까운 음성은 마리아 칼라스의 존재가 곧 오페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실감하게 한다. 강압적인 어머니로 인해 강제로 노래해야 했고, 오나시스에 의해 노래를 금지당한 시기를 지나, 이제야 스스로 노래할 수 있게 된 그에게 이전과 같은 몸과 목소리와 무대는 더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노래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몸을 울려 머릿속에 존재해왔던 억눌린 무대와 노래를 통과시킨다. 온전히 자신을 위한 노래를.

무엇이 그들을 예술가로 만드는가

<마리아>

<재키>와 <스펜서> 옆에 <마리아>를 세운 이유를 적극적으로 의미화해보자면, <마리아>는 예술과는 무관하다고 인식된 재키와 다이애나를 예술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이들을 예술가로 만드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에게 닥친 개인적인 비극이다. 극 중 마리아가 ‘노래는 고통과 가난에서 탄생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이 겪은 비극은 지난 세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서사다. 21세기에서 바라본 20세기의 비극적인 오페라는 20세기의 영상매체와 음성 기기를 타고 들려온다.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동시에 20세기의 노이즈를 동시에 연기하며, 캐릭터를 삼킨 뒤 내뱉었다. 그사이 20세기의 상징적인 자료화면 속에 배우가 들어가 거니는 모습을 재현하는 데 만족했던 연출적 욕망은 배우의 페르소나 위에 인물의 영혼을 초대하는 방식을 거쳐, 실존 인물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욕망 없이 분열된 상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전진했다.

주인공의 조력자들

<스펜서>

우울한 주인공 곁에는 조력자가 함께한다. 재클린 옆에는 비서 낸시(그레타 거윅)가, 다이애나의 옆에는 의상 담당자인 매기(샐리 호킨스)가 있다면, 마리아의 옆에는 집사 페루치오(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와 가사를 돕는 브루나가 있다. 매기를 제외하고는 실존 인물이지만, 파블로 라라인은 실제에 가깝게 묘사하는 대신, 매번 다른 강도로 관계를 창조해왔다. 낸시가 최소한의 역할에 그쳤다면, 매기는 다이애나가 마음을 터놓는 유일한 친구처럼 보인다. <마리아>에서의 조력자들은 집에서 일상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주는 심심한 위안을 체감하게 한다. 마리아는 페루치오에게 피아노의 위치를 바꾸도록 지속해서 요청하고, 오믈렛을 만드는 브루나 앞에서 평가를 요청하며 천연덕스럽게 오페라를 부른다. 다시 옮겨질 것을 알면서도 허리를 구부리는 동작과 노래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에도 프라이팬을 돌리는 타이밍을 양보하지 못하는 손목 스냅이 은은한 유머를 퍼뜨린다. 이것은 실화에 바탕을 둔 묘사는 아니지만, 이들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하나의 창이다. 충직한 두 조력자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은 마리아의 사후에도 그의 개인사와 관계된 비밀을 일절 발설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함께 머물렀던 시공간 속에 관계를 단단히 봉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