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져 있듯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크래쉬>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인터뷰에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당시 코폴라가 강한 반감을 표했으며 직접 상패를 건네주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회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98년 국내에 검열본이 개봉했을 때 <크래쉬>의 홍보 팸플릿에는 코폴라의 평이 실려 있다. “<크래쉬>에 상을 주는 이유는 첫째, 대담하기 때문이고 둘째, 뻔뻔스럽기 때문이다.”(동숭씨네마텍 팸플릿) 코폴라의 사례가 보여주듯 <크래쉬>를 둘러싼 반응은 모순에 처해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교통사고와 그로 인해 훼손된 신체를 페티시 삼고, 자동차가 으스러지는 순간에 절정에 달하려는 도착적인 행위를 반복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 <크래쉬>는 이 관능을 너무도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욕망과 ‘거의’ 일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 관능에 몰입하는 것이 도덕적 거부감을 낳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동차와 충돌하는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는 것처럼 <크래쉬>의 관능은 그것을 체험하는 일에 대한 반작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크래쉬>는 충격적인 영화일 수 있지만, 동시에 충격을 무대화하는 퍼포먼스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 분열적 경험은 영화 보기라는 활동이 재현의 대상과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누설한다. <크래쉬>는 단순히 욕망의 극단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쾌락의 극단을 향해 질주한다’는 식의 설명은 한없이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자동차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사물이 아니거니와 영화 또한 도달 가능한 욕망을 향해가는 모험의 여정이 아니다. <크래쉬>를 본다는 것은 대상과 ‘거의’ 일체화되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음이라는, ‘거의’와 ‘결코’ 사이를 무한히 왕복하면서 지극히 강박적인 반복을 통해 도달 불가능한 관능으로 향하는 일이다.
<크래쉬>에서 자동차는 이동 수단이라기보다 인간의 신체와 더불어 움직이고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이다. 광고 제작자 제임스 발라드(제임스 스페이더)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자동차를 향해 기계 이상의 애착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이 충돌한 차량의 동승자였던 헬렌(홀리 헌터)과 가까워지며 본(엘리어스 코티어스)을 알게 되고, 차체가 부서지고 파편이 날아가는 충격과 동시에 성적 에너지를 표출하려는 본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다. 그들은 유명 스타의 자동차 사고를 재현하는 쇼를 벌이거나, 자동차 사고에 대한 경고가 담긴 교육용 비디오를 함께 시청하고, 사고 차량 안에서 섹스를 하며, 도로 위에서 서로를 들이받아 치명상을 입고 때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과 기계는 서로의 신체를 망가뜨리거나 서로가 망가지는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새롭게 합성된다.
“크로넌버그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것은 새로운 발명품이나 현상을 발표하고 전시하는 장면들이다.” (김병규, <씨네21> 1468호) 크로넌버그의 영화에 늘 발명품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기계들은 본래의 일상적 용도에서 이탈하여 해부와 재구성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발명’을 ‘외과수술의 흔적을 새긴 것’이라고 바꾸어 말해보면 어떨까. 신체를 절제하고 내부를 헤집는 외과수술은 오히려 신체를 훼손하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상태다. 크로넌버그의 영화는 이러한 수술의 긴장을 화면에 도입하는 장소다. 물론 <크래쉬>에는 <네이키드 런치>의 타자기나 <미래의 범죄들>의 수술대, <엑시스턴스>의 게임 콘솔처럼 낯설거나 기괴한 형태의 기계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적어도 완성된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 본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현대 기술에 의한 인간 신체의 재형성”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 기계는 인간의 신체와 자동차가 서로 결합하고 훼손하며 흉터를 새기는 과정에서 발명된다. 이것은 섹스와 거의 유사하다.
물론 자동차와 인간이 직접 성교를 나누는 <티탄>에 비하면 <크래쉬>가 자동차와 섹스를 접붙이는 방식은 생각보다 급진적이지 않다. <크래쉬>에서는 자동차와 인간의 일체화를 위해 섹스가 매개로 동원된다. 자동차와 인간의 신체가 결합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섹스는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결핍의 상태로 제시된다. 영화의 오프닝은 세개의 섹스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임스의 아내 캐서린(데버라 카라 웅거)은 비행기 격납고에서 파일럿과, 제임스는 촬영장에서 카메라걸과 섹스를 나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집 베란다에서 각자의 외도를 묘사하며 섹스를 한다. 캐서린이 제임스에게 묻는다. “그래서 느꼈어?” 제임스가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자 캐서린은 답한다. “다음번엔 되겠지. 다음번엔….” 이 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캐서린과 성교를 하며 제임스가 중얼거리는 대사이기도 하다. <크래쉬>는 “다음번엔 되겠지”라는 말을 끝에서 되갚아주는 구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앙갚음은 외도로 인한 복수심 같은 감정적 인과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섹스는 둘 사이에 다른 이를 끌어들이는 행위일 뿐, 일체화되고자 하는 소망의 미끄러짐 속에서 섹스는 언제나 결코 완수될 수 없는 시행착오로 남는다.
크로넌버그의 초기 영화 <스테레오>에서도 일체화를 소망하는 실험체가 등장한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말을 할 수 없는 대신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한계 없이 공유할 수 있게 되지만, 결국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만다. 흥미롭게도 <스테레오>는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다. 이는 언어능력을 제거한 피험자들의 외상이 영화의 형식적 특징으로 전이된 듯한 인상을 준다. <크래쉬>에서도 인물들 사이에서 텔레파시와 유사한 정신적인 교통이 발생한다. 가령 제임스는 사고 후 “요즘 차가 더 막히나? 사고 있기 전보다 세배쯤 심한 것 같아”라고 말하고, 헬렌 또한 자동차가 10배는 많아진 것 같다고 느낀다. 자동차를 향한 소비 페티시즘, 물신화와 같은 산업의 징후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정신은 서로의 의식에 침투하며 경계를 허무는 조건이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광고산업의 외상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제임스의 직업이 광고감독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사고를 당한 순간에 광고 자료를 읽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화면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형식적 특징이자 페티시즘을 통해 일체화되고자 하는 강박이 전이된 표면이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팀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이 종양을 제거하는 퍼포먼스를 섹스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크래쉬>의 형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의 모든 장면을 섹슈얼하게 읽어내게끔 자극한다. 신음의 강도나 체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물리적인 섹스가 아닌 장면도 지극히 섹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가령 가브리엘(로재나 아켓)이 쇼룸에 전시된 세단의 운전석에 탑승하려 시도하는 장면에서, 가브리엘이 다리에 착용한 보철기구에 카시트가 걸려 찢어지고 만다. 이 장면이 섹스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제임스가 조수석에서 이 상황을 관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장면 바로 뒤에 제임스와 가브리엘이 차 안에서 실제 성교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지지만, 이 행위는 쇼룸에서 일어난 일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가브리엘이 검정색 세단에 탑승하려 애쓰던 순간부터 섹스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의 성행위에 자동차를 끌어들이기 위한 영화의 편집술이다. <크래쉬>는 이런 식으로 결코 끝난 적 없는 하나의 섹스를 제시한다.
끝나지 않는 섹스는 노동과 다름없다. 다시 한번 주지하건대, 이 영화는 쾌감으로 질주하는 모험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되는 재생산의 형벌에 가깝다. <크래쉬>에는 전율과 환희의 얼굴이 없다. 모든 것에 익숙해진 듯, 제임스는 사고를 당할 때조차 무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 텅 빈 얼굴에서 충돌과 쾌락의 교차를 읽기 위해서는 ‘쾌감의 극단이 고통’이라는 익숙한 도식을 넘어, 조금 다른 경로가 필요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화자는 사회와 적대한 채 끝없이 침잠하는 자가 도달한 자기 성찰을 고백한다. 그는 치통 속에도 쾌감이 있다는 비유를 드는데, 그 쾌감은 바로 신음 소리에서 표현된다. “이건 솔직한 신음이 아니라 적의에 찬 신음인데 (…) 이 신음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쾌감이 표현되거든.” 치통을 앓는 자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쾌감을 느낀다. 고통에 쾌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음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일에 쾌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쾌락은 통증을 신음으로 변형시켜 ‘쇼’의 현장으로 만드는 데서 온다. <크래쉬>의 쾌감은 죽음과 최대한 근접해지는 순간의 쾌감일 수도 있지만, 현실을 되풀이할 수 있는 ‘쇼’로 변형하는 데서 오는 적대적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제임스는 처음 사고를 당한 뒤 교통사고에 대한 경고를 귀 아프게 듣다가 막상 당하니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말한다. 이후 제임스는 안전벨트가 답답하다는 듯 거칠게 풀며 사고에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 가상현실의 인물처럼 행동한다. 교통 시스템은 사고를 통제하려 하면서 필연적으로 사고를 재생산하는 현대적 죽음의 메커니즘이다. <크래쉬>의 인물들은 쇼를 통해 예기 불안을 현실화하고, 페티시즘의 함정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시스템의 역설을 내보이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그들에게 도로는 주행이 내포하는 위험 요소들을 자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쇼의 장소이며, ‘보여지기’의 욕망을 충족하는 무대다. 문제는 쇼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본은 캐서린과 제임스가 탄 차를 쫓다가 고가도로 아래로 추락해 최후를 맞는다. 이 사고가 그의 프로젝트였는지, 단순한 사고였는지는 알 수 없다. 쇼가 끝난 적 있던가? 본의 죽음은 극적인 계기가 되지 못하며, 쇼의 일부와 다음 사이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다음 장면에서 제임스는 도로 위를 가로지르며 캐서린의 차를 추격하고 있다. 자동차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충돌을 위한 거리를 벌기 위해 잠시 멀어지는 것뿐이다. 제임스의 자동차와 부딪힌 캐서린은 고가도로 아래로 추락한다. 제임스는 “다음번엔 되겠지”라고 중얼거리고, 캐서린은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지금 당장 이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눈물은 ‘다음번’이 수없이 반복된 미래에서 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넌버그의 영화는 언제나 미래를 다룬다. 그 미래는 첨단이 아니라 현실의 가능한 조합들로 수술된 대안 세계이며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본 적 있는 미래가 다시 한번 상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