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단에 <검은 수녀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검은 사제들>(2015)의 흥행 이후 제작사인 영화사 집은 세계관의 확장을 느슨하게 고민해왔다. 여러 해에 걸쳐 구상한 끝에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수녀를 선택했다. <검은 수녀들>은 12형상이 다시 나타난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수녀 유니아(송혜교)와 미카엘라(전여빈)는 부마자인 어린 소년 희준(문우진)을 살리고자 그의 몸속에 숨어든 악령을 빼내려 한다. 두 여성의 연대가 강조된 만큼 휴먼드라마에 가까워졌다. ‘서품받지 못한 수녀는 구마를 할 수 없다’라는 현실적 제약에 맞서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여성들의 커브 없는 질주는 뜨거운 울림을 전한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각색에도 참여한 오효진 영화사 집 제작이사,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송혜교 배우와 작업할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는 권혁재 감독을 만나 <검은 수녀들>의 안과 밖에 대해 들었다.
- <검은 사제들>의 흥행 성적표를 받아본 직후 두 번째 이야기의 기획 개발에 착수했나.
오효진 작정하고 돌입하진 않았고 몇년에 걸쳐 러프하게 구상해왔다. 여타 시리즈처럼 주인공은 그대로 두고 안타고니스트에 방점을 찍어 악마만 계속 바뀌는 방향도 생각했는데 동어반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개발을 멈췄다가 재개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돌아갔다. <검은 사제들>은 결국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였고 그 본질에 맞춰 다시 발전시켜나갔다. 12형상이 다시 나타나서 위험에 처한 사람이 생겼는데 사제들이 한국에 없으면? 그때 지인이 수녀 아이디어를 준 거다. 그런데 남은 사람이 김범신 신부(김윤석)의 능력 있는 제자 수녀뿐이라면? 수녀는 구마를 할 수 없으니 사람을 죽게 내버려둬야 할까?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이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그리고 숙성된 시나리오와 함께 권혁재 감독에게 연출을 제안했다. 그간 따스한 감성으로 아웃사이더인 인물들을 그려왔고 오컬트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 연출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권혁재 오 이사와 친분이 있어 이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는데 <검은 사제들>의 팬이라 관심을 가지고 진행 상황을 지켜봐왔다. 그러던 차에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레이어가 켜켜이 쌓인 신선한 이야기, 인상적인 캐릭터, 내 관심 주제인 협력과 연대까지 담겨 있었다. 송혜교 배우가 이 작품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더 글로리>에 이어 또 다른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그와 작업해보고 싶었다.
- 여러 제약에 둘러싸인 인물들의 상황을 함축한 촬영이 돋보였다. 특히 두 수녀의 얼굴이 여백 없는 빅 클로즈업으로 잡힐 때 이들이 느끼는 갑갑함이 생생히 전해졌다.
권혁재 인물과 그들의 미세한 감정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였다. 그걸 정확히 이해한 배우들의 디테일한 표정을 잘 담아내고 싶기도 했다. 화면비 1.66 대 1은 최찬민 촬영감독의 아이디어였다. 기존 오컬트 드라마와 다른 우리 영화만의 개성과 관객이 인물에 확 집중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놓은 묘책이었다. 조명의 공도 컸다. 이철오 조명감독이 그림자에서도 인물의 심리와 영화의 무드가 느껴질 수 있도록 디테일하게 조절했다. 여기에 김태성 음악감독의 실험적인 사운드까지. 베테랑들의 협업에 매 순간 감탄했고 그들을 믿고 갈 수밖에 없었다.
- 유니아의 ‘짜증’이란 단어는 어떻게 선택했나. 그가 남성 종교인 무리와 악령의 말을 짜증이란 말로 간단히 받아칠 때 은근한 쾌감이 있더라.
오효진 그건 내 실생활이 반영된… 직장인들은 공감할 거다. (웃음) 성정상 유니아는 그동안 기도로 도움을 주되 구마는 할 수 없는 억압적인 상황을 계속 참아왔을 거다. 그로 인해 병도 생겼을 테고. 그 모든 분노를 길고 과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짜증 정도로 표현하고 싶었다.
- 유니아와 미카엘라의 관계는 어떤 그림으로 생각했나.
오효진 유사 언니와 동생 관계, 둘이 8~9살 차이가 난다고 설정했고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여자 선배가 도움을 구하는 여자 후배에게 조언하는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많은 여성 관객들에게 친숙할 거다. 전체적으로 세대와 세대가 연대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두 수녀와 바오로 신부(이진욱), 애동(신재휘)과 희준도 함께 힘을 합쳐 지금보다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나갔다.
- 기도문이 주도구인 수녀들의 구마 의식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컸을 것 같다. 희준의 방에서 치러진 구마 의식 시퀀스는 어떻게 준비했나.
권혁재 주변에서 클라이맥스이니 볼거리가 풍성해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나는 이 시퀀스에서도 여전히 인물의 감정선을 제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품을 따로 추가하지 않았다. 한 아이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유니아와 미카엘라, 저 밖에서 힘을 보태주는 애동, 그리고 저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는 희준까지. 이들의 팽팽한 감정선이 끝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 악마가 유니아에게 늘어놓는 말들의 수위가 세다. 들으면서 불쾌감을 느낄 여성 관객이 적지 않을 텐데, 순화해야 한다는 고민은 없었나.
오효진 다른 무엇도 아닌 철저히 악마의 입장에서 쓴 대사였다. 악마는 서품도 받지 못한 여자가 현장에 온 걸 보는 게 처음이었을 거다. 그 당황스러움을 유니아가 가진 병과 그의 자격 없음을 건드리는 걸로 표현한다. 중요한 건 유니아가 그런 공격과 자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방식대로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다.
권혁재 그런 유니아를 중심으로 연대의 힘들이 하나둘씩 포개지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
- 앞서 말한 선택은 유니아가 자기 뱃속에 악령을 봉인한 채 불길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오효진 전통적인 오컬트 장르의 흔한 클리셰가 악마의 잉태이지 않나. 그러나 <검은 수녀들>은 악마를 가두는 걸로 전복시켜 한층 나아간 이야기가 되길 원했다.
권혁재 이 선택으로 유니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생명을 살리겠다는 기조를 끝까지 가져간다.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맞대응하고 저항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담대한 용기를 가진 캐릭터를 잘 살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