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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클로즈 유어 아이즈>, 두 개의 영화, 무능한 기적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에 장 뤽 고다르는 영화감독의 자화상 작업을 착수한다. 만들어진 영화엔 <JLG/JLG: 12월의 자화상>(이하 <JLG/JLG>)이란 제목이 붙는다. 영화잡지 「필름 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이 영화의 제목이 ‘고다르에 의한 고다르(JLG by JLG)’가 아니라 단지 ‘고다르/고다르(JLG/JLG)’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화감독의 자화상이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하나의 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뉜 위계 없는 형상을 조직하는 것이다.

<JLG/JLG>는 픽션과 현실, 신원 미상의 어린아이 사진과 노년의 영화감독, 눈앞에 보이는 세계와 스크린에 영사된 이미지를 교차한다. 고다르의 손은 고다르의 자화상을 스크린에 새긴다. 고다르는 고다르를 이중인화한다. “인간은 포지티브로 태어나 네거티브를 요구받는다”라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는 이 영화는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이미지로 이루어진 필름의 물질성에서 매체의 근본적인 원리를 찾는다. 영화는 둘로 분리된 이미지의 외양(빛과 어둠,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현실의 흔적과 허구적 재현)으로 통합된 세계를 형성한다. 그 안에서 둘이자 하나인 모순적 운명에 노출된 자화상이 생겨난다.

고다르보다 10여 년 앞서 또 다른 영화감독의 자화상이 만들어진 바 있다. 하지만 그 자화상은 연출자의 사후에 공개될 것을 전제로 제작되었기에 뒤늦게 공유될 수밖에 없었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은 1981년에 완성되고 나서 그의 죽음 이후인 2015년에 공개되었다. 그림자 같은 형체로 보이는 두 명의 방문객은 기나긴 기다림을 끝내고 올리베이라의 저택에 들어선다. 올리베이라는 무명의 방문객들에게 가족의 모습을 담은 오래된 사진과 필름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는 기억의 주체가 사라진 기억을 영사기에 태워 전달한다.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던 내밀한 과거는 뒤늦은 미래의 시간에 도착한다. 우리는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뒤늦게 마주하며 필름 이미지에 의해 분할된 시제 속에 위치한다.

두 편의 영화는 영화감독의 사적인 자화상이자 영화가 스쳐 지나간 역사의 자화상이며 스크린에 투사된 영화 매체의 기억이 꿈꾸는 자화상이다. 이들에게 영화란 조각난 시간의 몽타주를 실행하는 장소이고, 과거와 현재의 꿈이 만나는 접촉면이다. 이 말을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똑같이 돌려주고 싶다. 영화감독 미겔이 그의 편집기사 맥스와 함께 다큐멘터리에 상영될 과거의 영화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에리세는 영사기에 돌아가는 필름 릴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노출한다. 발광하는 이미지의 반대편에 현실에서 빌린 어둠이 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두 이미지 사이에 걸쳐 있는 물질적 유령으로 출현한다.

둘로 나뉜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로 시작한다. 미겔은 오랜 친구인 훌리오를 주인공으로 <작별의 눈빛>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지만 훌리오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촬영이 중단된다. 미겔의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라진 훌리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실은 한순간에 영화를 둘러싼 모든 관계를 무너뜨린다. 실종의 미스터리 앞에서 기억과 증거는 흩어지고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적힌 영화의 위상은 빅토르 에리세의 작업에 감도는 미완성의 흔적을 환기한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남쪽>은 절반의 이야기를 촬영하지 못한 미완성의 영화다. 이후로 에리세는 보르헤스의 단편 <죽음과 나침반>을 각색해 세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하려 했지만 무산되었다. 후안 마르세의 원작 소설로 <상하이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계획했지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영화엔 스크린에 실현된 기록과 실현되지 못한 영화가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의 뒷면에는 둘의 기억이 잠재해 있다. 에리세는 현실의 실패를 만회하는 장소에서 영화가 솟아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그의 새로운 영화는 영화가 손상된 자리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시작한다.

미겔이 만든 영화 속 영화는 도입부에서 야누스 조각상을 비춘다. 영화에 삽입된 조각은 몇 가지 함의를 포함한다. 견고하게 정지해 있는 조각은 움직임의 예술인 영화의 특권을 중단하는 불손한 매개다. 침묵하는 조각의 얼굴은 숏과 리버스 숏의 교환으로 성립되는 영화적 시선의 문법을 교란하는 무관심한 세계의 표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앞뒤로 붙은 두 얼굴이 하나의 조각을 구성하는 야누스상의 형태는 영화 곳곳에 편재된 원리를 마주하게 한다. 서로의 눈빛을 바라볼 수 없는 두 개의 얼굴로 만들어진 조각상. 조각은 하나의 몸이 둘로 나뉘는 영화적 육체의 운명을 환기할 것이다.

야누스 조각의 미장센이 보여주는 것처럼, 빅토르 에리세는 둘로 나뉜 얼굴을 여러 곳에 배치한다. 미겔의 영화 <작별의 눈빛>에서 훌리오가 연기한 역할인 프랑크는 유대인 레비의 딸을 데려오라는 의뢰를 받는다. 레비의 딸은 프랑스에서 불리던 ‘주디스’라는 이름과 중국에서 불리는 ‘차오수’로 나뉘어 있다. 실종된 훌리오를 찾는 미겔은 실패한 영화감독이지만 여러 편의 책을 출간한 소설가이다. 그의 이름은 미겔이지만 휴양지의 해변에서는 마이크로 불린다. 미겔의 오랜 연인인 로라는 미겔과 훌리오를 번갈아 만났다고 말한다. 미겔이 찾는 옛 친구는 해변에서 사라진 배우 훌리오와 요양원에서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가르델로 찢어져 있다.

그리고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인 <작별의 눈빛>의 필름이 있다. 처음에 이 필름은 훌리오를 찾는 탐사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으로 활용되는 도구였지만, 영화의 끝에선 훌리오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한 증거물이 된다. 이 영화의 피사체들에겐 끝없는 대칭과 불일치가 드리우고 있다. 하나와 다른 하나는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관계에 놓인다. 이런 무대에서 에리세가 수행하는 영화의 실천은 서로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의 교환을 성립시키는 것이고,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라는 영화의 소박한 원리로 불가능한 기억에 다가서는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이 복잡하게 얽힌 채로 유발되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산한다. 하지만 두 얼굴은 아직 직접 만나지 않는다. 두 얼굴의 시선이 마주하는 몽타주는, 아직 이 영화가 실행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무능한 영화

망각과 회고의 감각을 다루는 이 영화의 화면에는 기억을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들로 가득하다. 사라진 훌리오를 취재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영화의 리허설 과정이 녹음된 녹음기, 옛 연인 로라에게 선물한 미겔의 첫 번째 소설, 로라가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의 선율, 훌리오의 기록이 적힌 신문 기사, 미겔의 죽은 아들이 그린 만화, 훌리오가 간직한 <작별의 눈빛> 속 어린 소녀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예술과 매체에 남겨진 기록이 과거를 되짚는 미겔의 여정을 채운다. 그런데 이토록 복잡하게 뒤얽힌 매체의 기록 사이에서 영화는 무기력하다. 에리세에게 있어 영화는 회고의 매체가 아니다. 영화 속 이야기는 불충분하고, 이미지의 빛은 소실되었으며, 관객의 기억은 지워져 있다. 영화와 인접한 매체들의 여정이 기억을 되짚고 돌아본다면, 영화의 여정은 기억을 유예하고 지연시킨다. 영화는 불순한 매체의 흔적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프랑켄슈타인의 조각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는 무능한 예술이다. 완성되지 못한 미겔의 영화는 훌리오의 기록이 남아 있는 자료로 제시되지만, 실종자의 실체에 가닿을 수 없는 한계를 노출한다. 미겔은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무책임한 영화감독이면서 훌리오의 행방을 찾지 못한 무력한 조사관이다. 사라진 훌리오의 궤적을 뒤따르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서사에서 영화는 추적을 방해하고 실종자의 주변을 무의미하게 배회한다. 영화감독으로서 미겔은 훌리오의 실종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그는 탐문의 역량을 잃어버린 조사관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이 무능한 예술인 영화에 두 번째 기회를 건넨다. 영화의 절반 지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탐문의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되찾는 대상과 방법이 달라진다. 미겔은 어느 수녀원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가르델이 훌리오인 것 같다는 연락을 받는다. 수녀원에 도착한 미겔은 가르델을 보고 그가 훌리오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가르델은 역행성 건망증으로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다.

에리세는 추적의 형식조차도 둘로 나눈다. 미겔은 두 번의 수동적인 추적을 반복한다. 전반부의 이야기가 남겨진 기록과 흔적을 통해 실종된 훌리오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태로 주어진다면, 후반부는 기억을 잃은 가르델의 삶에 기록과 흔적을 채우는 형식으로 주어진다. 추적은 미겔에게 은총처럼 주어진다. 이와 결부된 또 다른 변화는 전반부에서 미겔과 훌리오를 둘러싸고 있던 매체의 기록이 후반부의 수녀원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른 매체의 기억은 사라지고 오직 영화와 영화의 물질적 토대인 사진적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무능한 영화의 흔적만이 잔존하는 이 장소에서 에리세는 둘로 나뉘는 시선, 가설, 변주로 영화라는 기억장치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미겔과 가르델은 반복해서 수녀원 숙소 앞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두 사람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같이 찍힌 사진을 꺼내 보고, 둘만 아는 방법으로 매듭을 풀고, 서로의 손을 만지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가르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시선은 한곳을 향해 던져질 뿐 되돌아오지 않는다. 20세기 영화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물과 동작을 매개로 영화의 매혹적인 순간을 고안해내고 스크린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겨두었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의 특권적인 몸짓은 그 역할을 잃는다. 대화하고 손짓하고 바라보고 재회하는 몸짓의 조건으로도 영화는 기억을 되돌리지 못한다. 영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벤치 앞에서, 또 다시 무능력의 예술이 된다.

망각의 영화(관)

이토록 무능한 영화는 그러나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다. 눈앞의 세계가 둘로 나뉜 얼굴을 관측할 수 없다면, 영화는 그 무능함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장치로 거듭날 수 있다. 스크린은 영화 매체에 깃든 무능력을 자각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비로소 낡고 오래된 영화관에 도착한다. 미겔은 완성하지 못한 영화를 상영한다면 훌리오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에리세는 마치 영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듯 영화관에 도착한다.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벌집의 정령>의 도입부에서 마을의 관객들에게 도착한 영화는 한 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허구의 체험을 건넨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결말에서 기억을 잊어버린 관객 공동체를 초대한 영화는 한 남자의 시선에서 그 체험의 가능성을 다시 검토한다. 20세기의 아이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난 관능적인 몽상을 꿈꿀 수 있었다면, 21세기의 노인들은 영화를 빌려 현실로 되돌아오는 감각의 회복을 탐색한다.

미겔은 <작별의 눈빛>을 상영하는 극장에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일일이 지정한다. 스크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두 명의 수녀를, 훌리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방송국 프로듀서 마르타와 가르델을 찾아낸 수녀원의 직원 벨렌을 그 앞에, 훌리오의 딸 아나를 스크린 가장 가까이에 앉힌다. 마지막으로 가르델에게 아나의 옆자리에 앉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상영 시작을 알린 뒤 객석 맨 앞자리에 앉는다.

관객이 앉을 자리를 정하는 그의 요청은 ‘영화감독’인 미겔이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연출의 일부분이다. 그는 훌리오/가르델을 둘러싸고 있는 미스터리와 탐사의 과정에 더 많이 개입한 순서대로 관객들의 위치를 조정한다. 그러므로 그의 ‘연출’에서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앉아야 하는 자는 미겔 자신이다. 미겔은 스스로 실패하고 무능한 예술의 한 조각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가 시도하는 무능한 예술은 22년 전의 영화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앞에서 스크린 위의 훌리오가 보이고, 그의 뒤편에 기억을 잃은 가르델이 위치한다. 그는 훌리오와 가르델이라는 공존 불가능한 두 개의 얼굴 사이에 있다. 미겔은 극장에서 실현되는 두 얼굴과 시선의 결합을 통해 <작별의 눈빛> 속의 야누스 조각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마침내 미겔의 앞뒤로 같지만 다른 두 개의 얼굴(훌리오/가르델)이 나란히 위치한다. 이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얼굴을 앞뒤에 나란히 배치한 야누스적 건축의 장소다. 같은 의미에서 <작별의 눈빛>이 상영되는 폐관된 극장은 이중적인 영화의 장소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첫 장면에서 지켜본 완성되지 못한 영화를 관객의 기억에 투영하는 뒤늦은 몽타주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 끝없이 둘로 나뉘던 한 사람의 얼굴을 하나의 평면에 겹쳐두는 재귀적 몽타주를 실현하는 장소라는 측면에서 이 위상을 획득한다. 불가능한 얼굴의 결합을 꿈꾸는 바로 이곳에 두 겹으로 겹친 에리세의 영화가 거주한다.

우리를 응시했던 영화

<작별의 눈빛>이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영화 속에서 프랑크를 연기한 훌리오는 레비의 딸 주디스 혹은 차오수를 데리고 의뢰인의 집에 되돌아온다. 미겔은 비스듬히 시선을 돌려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가르델의 얼굴을 돌아본다. 돌아오지 않던 실종자, 시선, 그리고 영화가 스크린에서 되돌아온다. 뒤돌아보는 미겔의 눈빛에서 우리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의 어둠으로 향한 오르페우스의 여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20세기의 끄트머리에 영화의 세기를 돌아보는 작업인 <영화사(들)>에서 고다르는 “영화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도 죽지 않도록 한다.”라고 말한다. 오직 극장의 어둠 속에서만이 우리는 스크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시선 뒤에 머무는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미겔은 스크린을 중간에 두고 두 가지 시간과 눈빛과 영화가 교차하는 것을 되돌아본다.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훌리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 너머로 전달된다. 가르델은 과거를 향한 기억이 제거된 눈빛으로 스크린 속의 프랑크, 혹은 훌리오와 마주한다. 둘로 나뉜 얼굴은 이토록 단순하고 고전적인 시선의 결합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석에 앉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경험이 아니다. 가르델은 스크린 위의 훌리오를 모호한 얼굴로 바라본다. 그의 기억 없는 눈빛은 현실과 영화의 표면에 덧씌워진 완결된 의미의 기호를 걷어낸다. 에리세는 아직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시하지도, 무언가를 분명하게 의미하지도 않는 미완결의 장면으로 두 세계를 만나게 한다.

에리세는 영화의 끝에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되살아난 영화를 기적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망각한 자의 눈이다. 영화의 기적은, 기억에 잠겨 과거를 회고하는 눈빛이 아니라 스크린에 투사되는 빛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기억 없는 시선에 의지하는 경험이다.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자들의 시선에 영화의 몽타주는 주어지지 않는다. 막스의 말처럼 “드레이어가 죽은 이후에 영화관에 기적은 없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자들은 망각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드레이어가 사망한 이듬해(1969년)에 첫 단편을 연출한 빅토르 에리세는 그 이력을 잊어버린 듯한 마지막 장면을 조각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기억 없는 남자의 눈빛으로 영화를 다시 마주할 것을 요청한다. 이때 영화는 과거에 매개된 이미지가 아닌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솟아오른다. 스크린에는 오직 ‘남자’, ‘소녀’, ‘눈물’, ‘시선’이 존재한다. 그 이미지가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미결정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기적은 영화의 것이 아닐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모든 기억을 잃고 두 눈을 감는 가르델의 시선을 빌려 무능력한 영화가 묘사하는 기적의 모양을 더듬거린다.

미겔이 뒤를 돌아보고, 가르델은 눈을 감는다. 에리세의 영화관은 두 시선이 만나는 장소이면서 하나의 시선을 잃어버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는 돌아보고 눈을 감는 관계 속에 깃든다. 기억의 원죄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처럼 하나의 조각상에서 시작하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와는 반대로 누군가 눈을 뜨는 장면으로 끝나는 그 영화는 가난한 떠돌이와 눈먼 소녀의 사랑을 그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력을 되찾은 소녀는 떠돌이와 재회한다. 떠돌이는 소녀를 보며 말한다. “이제 볼 수 있나요?” 무성영화의 황혼기에 공개된 <시티 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눈앞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영화의 기적이 재회한 두 사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시티 라이트>의 (눈)빛에 두 눈을 감는 관객의 모습으로 대응한다. 영화는,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에리세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이것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끝이기 때문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를 향한 고별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무능력으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적에 가닿으려는 작은 섬광이며 영화의 또 다른 시작점으로 향하는 탄생의 희극이다. 가르델이 눈을 감는다. 검은 화면 위로 영사기에 돌아가던 필름 소리가 그친다. 이제 불 꺼진 스크린 앞에 앉은 우리가 영화를 마주할 차례다.

“아이는 무엇을 아는 것일까? 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알기를 원했던 세르주 다네라는 이 아이는 무엇을 알았던 것일까? ‘세계의’ 어떤 부재가 ‘세계의’ 이미지들의 현존을 훗날 요청하는 것일까? 나는 장 루이 셰페르가 그의 저서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에서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이라고 말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을 알지 못한다.” (세르주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