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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약자에게 다행한 삶은 없다

차별적인 세상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지식노동을 하는 여성이다. 일터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업무의 내용만 따지면, 사람들의 성별이 중요한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성차별적이다 보니, 즉 성별에 따른 발언권의 차이가 크고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양식과 발화습관이 현저히 다르다 보니, 주장과 설득이 주요 업무인 내 분야에서 ‘일이 되게’ 하려면 성별을 신경 써야 한다. 남성들이 더 많이 말하고, 남의 말을 더 많이 끊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그럼에도 의사 결정권자 중 남성의 비율이 더 높다는 차별적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여 고려하는 과정이 업무에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저 많은 말 중 어떤 말이 발언권의 확인에 불과한지, 어떤 말이 실제로 유의미한지를 따진다. 내게 발언자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 여성이라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위축되어 있는 게 아닌지 살펴 발언의 기회를 배분한다. 나에게 의사 결정권이 없는 일에서 바라는 결과가 있다면, 내 주장이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할 만큼 치밀하고 탄탄한지 점검하는 동시에 ‘사나운 여자’, ‘고집 센 여자’, ‘똑 부러지게 일하는 여자’ 같은 여성상 중 나의 태도 내지 이미지를 선택해야 한다. 내 주장이 타당하고 내 근거가 견실하면 내가 어떤 태도로 말하든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이상만으로 일했다가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위험이 있다.

나는 기혼이다. 소위 ‘정상가족’ 신화가 강하고 이성애 전제가 뚜렷한 이 차별적인 사회에서, 기혼인 나는 어떤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아플 때 보호자를 구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가구 단위인 경제·복지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릴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혼인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다음 까다롭거나 무능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더 사적인 질문을 받을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정상가족상과 그에 벗어난 경우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이상, 아무래도 기혼보다는 비혼이 혼인 여부를 더 많이 신경 쓰고 자신을 더 자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면 쉽게 인지한다. 반면 비혼인들이 차별받으면 이를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다. 나는 비장애인이다. 아마 나 자신이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 적이 꽤 많이 있을 것이다. 차별적인 현실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운신의 폭을 확보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다. 차별은 언제나 약자에게 확실하게, 조금도 헷갈릴 일 없게 가혹하다.

이 가혹함을 때로는 약자로서 경험하고 때로는 옆에서 지켜본다. 아무리 역지사지니 연대니 해도, 내가 경험하는 것과 내가 ‘피한 상황’을 보는 것은 결코 같지 않고 차별이 심할수록 이 두 경우 사이의 차이는 커진다. 이 차이도 고통스럽다. 가끔은, 아니 자주, 아득하다. 차별적인 세상에서 여러 층위의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 숨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