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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사진의 털] 투명인간 유흥희

“화가 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아주 미칠 지경이에요.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한달 전, 그녀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이런 작은 승리라도 끝내 얻으니 보람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노조탄압, 문자해고, 깡패동원, 임금체불, 야반도주 등 ‘악질자본 대백과사전’의 집필자가 되어도 좋을 법한 최동열 전 기륭전자 회장이 법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구속된 뒤였다.

“우리는 죽는 것 빼곤 안 해본 게 없어요.” 실로 그랬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비록 소수고 대부분 여성이었으나, 그들의 복직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기록될 만큼 처절하고도 강인했으며 끈질겼다. 피골이 상접할 지경까지 갔던 목숨 건 단식투쟁, 위험천만했던 고공농성, 한겨울 오체투지 등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린 고통의 투쟁을 한 고비 또 한 고비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많은 이들의 응원과 정치권까지 나선 협상으로 2010년 ‘사회적 타결’을 이뤄냈지만 최 회장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복직 노동자들은 회사 안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무시당했다. 임금이 체불되더니 급기야 노동자들을 팽개쳐둔 야반도주가 자행되었다. 해고노동자 유흥희는 최 회장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른 죄’로 법정에 서야 했다. 벌금형을 받아들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감옥에서 노역형을 살고 나온 게 지난해 일이다. 법은 늘 자본의 편이었다. 허나 해도 해도 너무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바뀐 권력의 지도가 반영된 까닭일까. 2017년 10월의 법정은 최 회장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작지만 소중한 승리였다. 우리 집 마당에 모여 한끼 밥을 나누며 가을 수다를 즐기려던 친구들의 모임은 ‘기륭투쟁 간신히 승리 겸 미꾸라지 자본 위로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통통한 가을 미꾸라지를 사다가 추어탕을 끓였다. 즐거운 하루였다.

회장이 구속 16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사실을 안 건 11월이 넘어서였다. 그는 법원에 공탁금을 걸었다. 노동자들이 배상을 거절하고 연락도 닿지 않는다는 핑계였다. 밝았던 유흥희의 얼굴엔 분노가 서렸다. 그녀의 활동은 규칙적이었다. 전화기는 늘 열려 있었다. 최동열에게 노동자는 예나 지금이나 투명인간인가. 공상소설 속 투명인간은 뭐든 저지를 수 있는 욕망과 공포의 존재인데, 최 회장의 투명인간은 왜 ‘없어도 좋은 존재’이기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