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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세상에서 가장 높고 추운 감옥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하셨는데, 부모님이 떡볶이집을 하던 친구가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선생님은 “어머 얘, 시시하게 회사원이 뭐니” 하면서 우스워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일찍 머리 굵은 그 친구가 철없던 젊은 선생보다 훨씬 더 세상 물정을 알았던 것 같다. 모두가 판사, 의사, 과학자,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된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장래희망은 ‘정규직’이리라(사육사가 되고픈 딸아, 그렇다면 부디 정규직 사육사가 되렴).

1998년 DJ 집권 첫해, 사상 전향제도를 폐지하고 준법서약서로 대체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 한 인권단체에서 연 토론회에서 작가 김훈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인생은 그 자체로 축복일진대 나는 그 방법이 무엇이든 감옥에서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는 내용이었다. 힘겹게 출발한 새 정권에서 빨갱이들 다 풀어준다는 공격을 피하고 양심수를 석방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정책이었지만, 준법서약서도 양심과 사상을 옥죈다는 비판이 쏟아지던 자리였다. 객석에 있던 나는 살짝 ‘왜 저렇게 딴 이야기를 하시지? 더 멋진 말씀도 많을 텐데’ 아쉬워했던 것 같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무탈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을 나이가 되어서야,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작가의 고뇌와 용기가 이해된다. 나는 울산 현대차 최병승씨가 그만 내려왔으면 좋겠다. 이 혹한에 몸이 너무 상할까 염려되고, 그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하다. 이 말을 이렇게 힘들게 꺼내는 것 외에 그를 도울 길을 모르겠다.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고개를 쳐들고 문자를 치거나 하트를 그리는 일조차 사치스러워 보인다.

현대차가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이 난 지 11개월이 지나서야 그를 ‘나홀로 정규직 발령’ 낸 것은 술수가 뻔히 보인다. 노사교섭은 중단되어 있고 7700명 사내하청 노동자 가운데 420명을 신규채용하겠다는 공고를 냈다. 더럽고 치사하다. 최씨는 이런 회사의 방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공 송전탑에 계속 머물겠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고 추운 감옥이다. 불법파견에 따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첫 사례를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소중한 일이다. 다음 투쟁은 다음 방식으로 하자. ‘양심수 최병승’씨가 너무 늦지 않게 ‘탈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