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 노부히로의 영화 <듀오>와 <M/Other>의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듀오>의 두 남녀 주연배우들의 이름은 다이얼로그에, 그리고 <M/Other>의 주연배우들의 이름은 스토리에 올라 있는 것처럼, 바로 이 영화들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스토리 구성에 긴밀히 관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스와의 첫 두 영화는 배우들의 영화에의 능동적 참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 영화들은 영화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는 미리 짜여진 설계도로서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대신 스와는 배우들에게 대략적인 상황만을 미리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자기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능동성과 즉흥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불안정한 하나의 과정이 펼쳐지게 되는데, 거칠게 말하자면 카메라로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기록한 것이 곧 스와의 영화이다. 영화란 것이 점점 더 통제 가능한, 또 그리하여 닫혀 있는 산품으로만 인식 돼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그건 어쩌면 영화에 대한 이런 일반화한 태도를 감히 거스르는 ‘모험적 시도’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데뷔작 <듀오>, 세계를 긴장시키다
1960년생인 스와 노부히로가 영화 만들기에 뛰어들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미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실제로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단지 마음속에만 묵혀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옮기기도 했다. 고등학생인 스와는 대단한 영화광이었던 자기 아버지에게 어느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한 대답은 자식의 어깨를 떨구게 할 만한 것이었다. “영화를 만들려면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넌 개성도 없고 너무 평범해”라는 게 스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소리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스와가 영화에 매력을 느끼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들어보면 그 소년이 영화에 흥미를 느꼈음직한 또래의 여느 다른 소년들에 비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특별한 눈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소년 스와는 미국의 실험영화감독 조나스 메카스가 쓴 영화비평문들을 모은 책을 읽고 자신이 알지 못하던 ‘다른 영화’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게 스와가 자기도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리고나서 그가 만든 영화들이 극영화가 아니라 극히 사적(私的)인 실험영화였다니 스와가 일찍부터 전통적인 양식의 영화와는 멀찌감치 벗어난 길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은 것을 모색하던 평범하지 않은 소년이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그뒤 미술대학에 들어갔건만 여전히 스와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생각은 자기에겐 미술도구보다 오히려 카메라를 통해 찾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야마모토 마사시, 나가사키 이치, 이시이 소고 같은 인디펜던트 감독들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들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영화를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조금씩 깊게 발을 내딛게 되었다.
많은 뛰어난 영화감독들이 그랬듯이 스와 역시 비평가들의 이목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는, 대단히 인상적인 장편 데뷔작으로 영화감독의 길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스와의 데뷔작인 <듀오>는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있지만 그게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케이와 부티크에서 일하는 유, 작은 아파트에서 동거하고 있는 이 두 청춘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어느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 두 마디의 대사라도 열심히 외우던 케이가 촬영장에서 갑자기 자기 역할이 없어져버렸다는 통고를 듣고 허탈해진 다음, 케이는 유에게 청혼을 한다. 케이의 느닷없는 프로포즈에 유가 흔쾌히 응하지 않은 뒤 케이와 유, 둘의 관계는 예전에 비해 영 어색해져버리고 결절점을 향해 다가간다. <듀오>는 타인을 알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이건 현재까지 스와가 만든 세편의 영화 모두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을 마치 현실의 한 단면에서 베어낸 듯 아주 리얼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간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티라는 것은 대부분 앞서 짧게 지적한 바 있는 스와 감독의 독특한 작업방식에서 유래한다. 배우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캐릭터들을 스스로의 자발성과 즉흥성을 최대한 살려내는 방식으로 현장에서 체현해내고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간다. 충실히 따라가야 할 시나리오도 없고 또 카메라의 위치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공간을 부유하는 카메라는 정말이지 전혀 예상 못했다는 듯 종종 인물들의 움직임이 있고서야 뒤늦게 그들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스와는 <듀오>를 픽션과 다큐멘터리이라는 도무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양식이 교차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어낸다.
“내 작품은 누벨바그 전체와 연관된다”
작업방식면에서 서로 유사한 <듀오>와 <M/Other>는 이름붙이자면, 시나리오가 없기에 인물들의 미처 예상할 수 없는 행로들을 따라가는 ‘추적(pursuit)의 영화’다. 이런 식의 스와의 영화를 가리켜 스와 감독 자신은 ‘사건’(event)을 담는 영화, 혹은 사건으로서의 영화라고 정의한다. 스와의 설명에 따르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나리오란 이미 쓰여 있는 것, 즉 과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걸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란 이미 행해졌던 어떤 것을 불러오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스와의 영화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어떤 것을 기록하는 영화, 현재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스와는 그처럼 현재 진행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그것으로부터 무언가 ‘발견’해내려고 고심한다. 그런 면에서 스와의 영화는 ‘발견의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스와의 영화처럼 일단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하면 어쨌든 그것에 담을 만한 일이 생기고야 만다는 컨셉을 갖고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물론 영화사에서 그 유례를 결코 찾을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은 결코 아니다. 스와는 자기가 만드는 영화가 누벨바그의 연장선 위에 놓이게 될 거라고 말한다. 누벨바그 멤버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와는 영화란 단지 (배우와) 카메라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 아니겠는가. 스와가 보기에 카메라 앞의 세계는, 그 앞에서 벌어지는 것들은 그 자체가 놀람의 연속인데 말이다. (적지 않은 수의 평자들은 스와의 영화가 혹 미국의 영화감독 존 카사베티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들 말하곤 한다. 그러나 조너선 로젠봄은 <듀오>에 대한 리뷰에서 이런 지적은 카사베티스의 영화들이 즉흥성에 기초해 만들어졌다는 명백한 ‘오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러면서 로젠봄은 언젠가 스와에게 자크 리베트의 이름을 거론했더니 그가 수긍하더라고 썼다. 하지만 광주에서 만난 스와는 자크 리베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벨바그 자체가 자기(영화)와 연관된다고 말했다.)
<듀오>에 이은 스와의 두 번째 영화 <M/Other>는 전작에서 이미 이용했던 방식을 좀더 발전적으로 이어받아 만들었다고 감히 평가할 만한 걸작이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한 중년의 이혼남 테츠로, 그와 동거하고 있는 디자이너 아키, 그리고 이들의 삶 속에 불쑥 끼어들게 된 테츠로의 아들 스케(테츠로의 전 부인과 살고 있던)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 엄마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사람과 영영 타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 사이의 깊지 않은 간극을 세밀하게 그려낸 <M/Other>는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스와를 비평적인 주목 아래로 끌어주었다.
<H 스토리>의 모험- 당혹스런, 그래서 매혹적인
<듀오>와 <M/Other>만을 보면 혹시 스와가 제도적인 방식의 영화 만들기를 거부하지만 그런 한편 자기 식의 영화만을 고집하는 또다른 유의 교조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다분히 정당하지 않은) 의심을 가질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스와의 세 번째 작품인 <H 스토리>는 앞의 두 영화와는 다소 상이한 작업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스와 자신의 말에 따르면 <H 스토리>는 촬영 당시에 일어난 즉흥적인 일들을 어느 정도 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텍스트와 연기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이것은 타자들 사이의 관계라는 스와의 기본적인 관심사를 끌어들이면서 그 안에 좀더 복잡한 관계망들을 그려보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도 스와의 ‘새로운 영화’라 할 만한 작품이다.
<H 스토리>는 스와가 자신이 태어난 도시 히로시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어떤 영화가 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 끝에 나온 산물이다. 스와는 히로시마에 대한 영화를 생각하면 할수록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레네의 이 영화는 현실 그대로의 히로시마를 묘사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영화이다.” 그래서 스와는 자기 영화 속에 정말로 레네의 영화를 끌어들인다. <H 스토리>는 스와 자신이 프랑스 여배우와 일본인 남자배우를 데리고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대략 40년이 지난 뒤 그대로 리메이크하려 한 것을 보여주면서 시작해 결국 그렇게 옛것을 그대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 끝을 맺는다. 그 사이에다 스와는 기억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세대, 혹은 역사적 기억을 상속받지 못한 세대가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기억의 불가능성, 영화 만들기의 실체 등과 같은 이런저런 이슈들을 흩뿌려놓는다.
스와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역사와 기억과 영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H 스토리>는 어찌 보면 아주 당혹스런 영화이고 또 어찌 보면 그래서 오히려 매혹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 모든 질문들을 요령있게 관련짓지 못하는 ‘불완전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H 스토리>의 불완전해보이는 면모에 대해 스와 감독은 아주 재미있는 예화를 들려주었다. 그가 이 영화의 레퍼런스가 되는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든 레네에게 <H 스토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주었을 때, 레네는 왜 완성된 영화를 보내지 않았냐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현재까지만 보자면 스와의 새 영화 <H 스토리>는 평자들로부터 대체로 너른 찬사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H 스토리>가 스와의 예전과는 다른 모험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건 분명해보인다. <H 스토리>에 이르러 자기 영화인생의 한 사이클을 마쳤다는 스와의 다음 사이클에 속하는 영화들이 기대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듀오>와 로 광주 찾은 일본영화의 새 희망 스와 노부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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