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방송>(WDR) 기자 린트너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다. 사건이 발생한 1962년 6월8일, 생후 6개월이었기 때문이다. 돌도 안 된 아기 린트너가 서독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주인공이 된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동독 정권이 철통같은 국경수비 체제를 마무리지어갈 즈음인 1962년 6월8일, 유람선 프리드리히 볼프 호가 납치되는 대형사건이 발생했다. 동독의 자존심이었던 최고급 유람선이 20살 젊은이 13명에 의해 피납된 것이다. 납치범, 아니 탈출에 목숨을 건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유 아니면 죽음이었다.
유람선 프리드리히 볼프는 1962년 6월8일 동서독 국경지대 운항허가를 받았다. 베를린의 동부 항구를 통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항만과 북쪽 부두는 동독 영토였지만 남쪽 부두는 서베를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 유람선이 남쪽 부두로 접근하는 순간 자유는 시작되는 셈이었다. 아기 린트너의 아버지는 전날 저녁, 선장과 제1 기관사에게 듬뿍 술을 안겨주었다. 만취한 선장은 아버지 린트너에게 모든 열쇠를 맡기고 잠이 들었다. 일단 성공이었다. 어머니 린트너는 여자친구 3명과 함께 동독 관광공사 청소원으로 위장해 승선했다. 아기 린트너는 바구니에 담아 객실에 숨겨두었다.
배가 6월8일 새벽 4시30분에 출항하자 술에서 깬 선장이 난동을 부렸지만 곧 포박되었다. 그런데 슈트랄라우 다리를 지나는 순간 총탄세례가 시작되면서 순조롭던 탈주과정이 갑자기 죽음으로의 항해가 되어버렸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13명이 희망의 끈을 놓으려는 찰나, 서쪽 부두에서 방어사격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건 탈주계획을 미 점령군에 사전에 통보한 서백림의 친구 덕분이었다.
<서백림향발 최후의 항해>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조합시킨 퍼포머티브 다큐멘터리, 일명 다큐테인먼트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증인들의 인터뷰와 자료 화면을 기초로 하되, 미흡한 부분은 연출된 신으로 보충하는 형식인 것. <서백림향발 최후의 항해>는 동독의 삶이 제3자들의 낭만적 시각과는 전혀 다른,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할 만큼 처절한 것이었음을 다큐영화와 극영화의 조합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