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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풍자극이 넘지 못한 장벽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하룻밤 새 만들어졌던 베를린 장벽은 동서독 주민들을 포함한 평화주의자들뿐 아니라 잘 나가던 한 미국 영화감독에게도 절망감을 안겨줬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선셋대로> <뜨거운 것이 좋아> 등의 빌리 와일더 감독. 지난 8월13일 베를린 장벽 건설 40주년을 맞은 독일의 언론들은, 이 동서 냉전의 상징적 건축물이 어떻게 와일더의 1961년작 <하나, 둘, 셋>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는가를 상세하게 들려줬다.

제임스 캐그니가 베를린에 파견된 코카콜라 지사장 맥나마라로 분해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코크(Coke)로 동구권 정복!”을 외치는 이 정치풍자극은 심각하기 그지없는 동서 갈등을 코미디적 상황에 담아 보여주려는 와일더의 야심작이었다. 61년 6월 초 케네디와 흐루시초프가 비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만 해도 촬영은 순항중인 것처럼 보였다. 이미 동서 베를린의 경계가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었지만 남자 주연 호르스트 부흐홀츠가 자전거를 타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는 장면의 촬영허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와일더는 자신의 영화가 동서냉전의 이데올로기로 경직된 베를린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어줄 것이라고 장담까지 했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의 촬영은 와일더의 사소한 장난으로 불발되었다. 자전거 뒤에 <루스키 고 홈>이라 쓰인 풍선을 달아놓았기 때문.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키는 소련병사들에게는 와일더의 유머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1961년 8월13일 호네커의 ‘XX작전’에 따라 하룻밤 새 세워진 장벽 소식이 서베를린 켐핀스키호텔 바에서 한잔 걸치던 와일더를 급습했다. 이와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은 물론, 그 앞 파리광장에서의 야외촬영도 모두 금지됐다. 뮌헨에서 스튜디오 촬영을 끝내고 베를린에 상경했던 와일더는 다시 짐을 싸 뮌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뮌헨 바바리아 스튜디오에는 20만달러짜리 가짜 브란덴부르크 문이 세워지게 됐다. 갑자기 얼어붙은 동서독 관계를 고려해 몇몇 장면을 수정했지만,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가로막혀 있더라’식의 충격에 빠진 사람들은 와일더의 풍자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하나, 둘, 셋>은 와일더에게 와일더 영화인생 최악의 흥행실패라는 참담한 기억을 남겨주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뒤 베를린은 이 영화와 감독에게 다시 한번 절망감을 안겨줬다. 1980년 베를린영화제가 빌리 와일더 회고전을 개최했을 때도 이 작품만 유독 상영불가 판정을 받았던 것. 극중에 등장하는 “소련이 냉전에서 승리한다고 놀랄 일도 아니지. 속바지도 안 입는 걸…”이란 대사에 분노한 소련의 강경함 때문이었다. 한해 전 <디어헌터>의 출품으로 동구권 불참이라는 곤혹을 치렀던 영화제 당국으로서는 연이어 쓰라린 수모를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소련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모리츠 드 하델른 위원장은 결국 동구권 보이코트보다 <하나, 둘, 셋>을 프로그램에서 삭제하는 쪽을 선택했다.

<타게스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와일더 감독은 당시의 상황을 씁쓸하게 설명했다. “한 신사가 걸어가다 넘어졌죠. 그가 다시 일어난다면 그건 웃고 끝날 일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신사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면 더이상 웃을 수 없죠. 비극적 사고니까요. 베를린 장벽 건설은 바로 그런 비극적 사고였습니다.”

베를린=진화영 통신원

단신/

레니 리펜슈탈과 생존 의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각종 장면을 담아 올림픽 기록영화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올림피아>와 나치전당대회를 그린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 등을 제작한 나치시대 여성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8월22일 99살 생일을 맞았다. 끝없는 실험정신과 대담한 촬영기법,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예술적 터치를 가했다는 영화사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고, 나치에 동조했다는 주홍글씨를 지금까지 떼지 못한 그녀는 현재 견딜 수 없는 요통 때문에 하루 세번씩 모르핀주사까지 맞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장부는 모르핀으로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1년 뒤 치를 100살 생일파티 계획을 벌써부터 세우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