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들어갔다가 나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를 보았다. “진중권 읽기, 그의 커밍아웃을 환영한다.” <브레이크 뉴스>라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 실린 기사다.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이 기사가 1면 톱에 올라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성 취향은 이성애에 가깝고, 일반적으로 이성애자는 남들에게 “저는 이성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에 기사를 열어보았다. 진중권이 ‘반(反) 김대중주의자’ 커밍아웃을 했단다. 내가 <한겨레>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보다 훨씬 국민들을 많이 괴롭힌 김정일에게 협력한 김대중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훨씬 더 나쁘다고 느껴질 수 있어야만 지성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없고, 그러니 당연히 <한겨레>에 실릴 리도 없다.
잠든 사이에 내 영혼이 몸을 빠져나와 유령판 <한겨레>에 기고한 걸까?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기자는 인터넷의 유명한 진중권 스토커 “황모씨”를 주체사상의 아버지 황장엽으로 해석하더니, 거기서 신속히 진중권의 본질에 관한 결론으로 날아간다. “그는 여기서 스스로 자신이 회색분자이며 변절자라는 것을 내비치지만 (…) 그는 회색분자도 변절자도 아닌 골수 반김대중주의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변절자”나 “회색분자”보다도 더 나쁜 게 “반김대중주의자”라는 독특한 관념. 이렇게 어떤 글은 자기가 다루는 대상보다 자기를 쓴 주체에 관해 더 많은 비밀을 흘리고 다닌다. 그 기자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슨상님의 위대함에 대한 자신의 굳은 신념이 다른 모든 이에게도 공유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 ‘난닝구’는 이미 정치학적 개념으로 학계에 정착됐다.
진중권의 변절을 보며 기자는 난닝구를 고쳐 입고 자신의 각오를 새로이 다진다. “진중권의 커밍아웃으로 점점 전선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므로 민족분단을 추구하려는 세력과 민족의 하나됨을 위하여 노력하려는 세력간의 피 튀기는 전쟁은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승자는 훗날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사이트에 연락해 기사를 내려달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내 어찌 잔인하게 “민족의 하나됨을 위하여” “피 튀기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의 저 비장한 무드를 깬단 말인가. 게다가 사실을 알고서 기자가 느낄 쪽팔림의 양은, “변절자”니 “회색분자” 소리 듣고 내가 느낀 불쾌감을 압도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원리를 위해서는 내가 그냥 “변절자”나 “회색분자”로 남을 수밖에.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현대사회가 근원없는 복제들의 무한연쇄라면, 사건의 처리도 포스트모던하게 ‘시뮬라크르의 자전’에 내맡겨둬야 하지 않겠는가. 복제가 복제를 낳고, 그 복제가 또 복제를 낳고, 그 복제의 무한한 자전 끝에 마침내 “이 싸움의 승자”를 “훗날 역사가 기록”할 때까지 말이다. 그 “훗날”이라야 결국 이 글이 실린 <씨네21>이 배달되는 날이겠지만. 어쨌든 “역사”의 버스 속에서 분노의 수류탄을 까서 자폭한 “승자”의 숭고한 뜻을, 나는 다음의 노래로 길이길이 기리련다.
황기가(黃旗歌)
원쑤와의 혈전에서 노란 기를 버린 놈이 누구냐
돈과 직위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그놈들이다.
높이 들어라 노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노란 기를 지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