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아침 일기예보는 초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경고했지만 반전과 파병 동의안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보다 강렬했다. 지난 4월1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앞에서는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여성영화인모임, 영화인회의, 인디포럼 작가회의 등 12개 단체에 속한 영화인들이 ‘반전을 위한 영화인선언’ 모임을 가졌다. 명동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계단에 임순례, 변영주, 박진표, 황철민 등의 감독과 유창서 영화인회의 사무국장 등 스무명 남짓한 인원이 모여 앉았다. 조영각 한독협 사무국장이 사회자로 이날 모임을 진행했고, 노란색 메인 플래카드 너머로 반전 문구를 쓴 피켓 서너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매일매일 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심정이다. 이것(반전시위)은 정의 수호 같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나에게도 무고한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행동이다.” 변영주 감독의 자유발언이었다.
삭발식 전, 조영각 사무국장은 “우리가 즐겨쓰는 이슈메이커이자 당사자들에겐 몇달간의 고역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적은 목소리로 많은 시선을 끌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없는 것 같다. 진부하더라도 이 방법으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적어도, 시선을 끈다는 그의 말은 적중했다.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노래말이 그곳 공기를 더욱 덥히며 연소돼가고 바리캉을 쥔 미용사들의 손이 부산스러워기 시작하자, 무관심하던 행인들의 발걸음은 역설적으로 느려졌다. 하지만 알몸으로 드러나는 두피에 가서 붙는 그들의 시선만 원망할 수는 없다. 진부하지 않으면서 더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기에, 세계는 너무 빨리 나빠지고 있었으니까. 사진 이혜정·글 박혜명
♣ “전쟁중단! 파병반대! 침공지지 철회하라!”순서 사이의 틈새를 채우는 구호. 피켓을 든 민동현(왼쪽) 감독과 조금 늦게 도착한 이은(오른쪽) 감독.♣ 명동성당 입구까지 올라가 다시 구호를. 박찬욱 감독은 자유발언에서 “이번에도 삭발하면 사람들이 내가 삭발하는 걸 좋아한다고 오해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고 농담을 띄우기도 했다. 가운데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감독.
♣ 이날의 메인 순서인 삭발식.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라는 단편을 연출한 이마리오(오른쪽)를 비롯해 최진성(가운데), 고안원석 등의 독립영화계 감독들과 인디포럼 사무국에 있는 최은정(왼쪽)이 의자에 앉았다.
♣ 명동성당 앞에 설치한 ‘반전 평화캠프’의 운영비를 모금했다. 1천원에서 10만원까지, 반전에 동의하는 영화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다양했다.♣ 조영국 사무국장이 이마리오 감독의 머리칼을 들어 보였다. “삭발 한번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작게나마 목소리를 모은다는 건 분명히 의미있다.”진부한 표현이지만 세련되어도 곤란했을, 여기 모인 사람들의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