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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방주> <야행> <할레드> <모번 켈러의 여행>

<러시아 방주> Russian Ark

월드 시네마/ 러시아/ 2002년/ 96분/ 알렉산더 소쿠로프

오후5시 부산극장2관

<러시아 방주>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사라져 간 것들을 향한 매혹을 드러내왔던 한 영화작가의 이상한 열정 그 자체이다. 죽은, 혹은 죽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안톤 체홉의 유령 등의 발자취를 따라 가던 소쿠로프의 궤적이, <몰로흐> 이후 결국 이렇게 굴절되고 마는 것은 이상하다. <러시아 방주>가 매혹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고통스러워진다.

소쿠로프의 신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우리로 하여금 자꾸 불편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러시아 방주> 전체를 단단한 동시에 유려하게 감싸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유령(들) 때문이다. 일단 영화의 무대가 되는 에르미타쥐(Hermitage)는 1050개의 방, 2000여 개의 창문, 120개의 계단, 대략 250만 점의 전시물, 그리고 지붕 위에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고 하는 그야말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여러 인물들, 즉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그리고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등은 물론이고 수많은 귀족들이 러시아 300년의 역사 속에 유럽문화를 아우른 광대한 프레임 속으로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진다. 소쿠로프는 단 하나의 길게 이어진 시점샷으로만 구성된 영화를 기획하고 HD 디지털 카메라와 유려한 스테디 캠 촬영술에 기대어 전대미문의 기이한 박물관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디지털의 미학을 통해 역사에 관한 비스콘티적 모럴리티를 다시 불러온 에릭 로메의 <영국여인과 공작>과는 달리, 소쿠로프는 여기서 온전히 비스콘티의 한 등장인물이 되어버린다.

<러시아 방주>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사라져 간 것들을 향한 매혹을 드러내왔던 한 영화작가의 이상한 열정 그 자체이다. 죽은, 혹은 죽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안톤 체홉의 유령 등의 발자취를 따라 가던 소쿠로프의 궤적이, <몰로흐> 이후 결국 이렇게 굴절되고 마는 것은 이상하다. <러시아 방주>가 매혹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고통스러워진다. 현재의 풍경을 어둠과 안개로 지워버리고 고집스레 항해에 나선 이 방주가 닻을 내릴 곳은 과연 어디일까.

글 / 유운성

<야행> Night Voyage

한국영화회고전/한국/1977년/75분/감독 김수용

오후2시 대영시네마 5관

<야행>은 한 여성의 일상과 내면 풍경을 따라잡으면서, 직장과 가정이 여성에게 강제하는 여러가지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영화로선, 남성 감독의 영화로선 드물게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 <야행>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야기의 인습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촬영과 편집과 음향 등으로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은행원인 현주는 직장 내 유일한 노처녀다. 직장 동료인 박대리와 비밀리에 동거 중이지만, 박대리는 그리 바람직한 파트너가 못된다. 수시로 현주의 몸을 탐하지만, 현주의 만족은 그에게 중요치 않다. 현주에 대한 배려의 맘이 없는 그는 결혼 약속도 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일주일의 휴가를 청한 현주는 고향으로 내려가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노골적인 유혹이 넘치는 밤거리를 헤매 다닌다. 현주의 변화를 눈치챈 박대리는 청혼을 하고,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현주의 고향으로 함께 내려간다. 잠든 박대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주는 혼자 조용히 기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직장에서 다시 만난 박대리에게 현주는 '휴가는 끝났다'는 쪽지를 내민다.

1973년에 제작됐으나, 검열 때문에 77년에 개봉한 <야행>은 당시로선 꽤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결혼한다는 전제도 없이 동거에 들어간 커플, 그리고 성적 욕구 불만에 몸부림치는 여주인공,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음적인 시선, 남자들이 득세하는 밤거리와 밤문화를 노골적으로 묘사할 만큼 대담한 한국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야행>은 한 여성의 일상과 내면 풍경을 따라잡으면서, 직장과 가정이 여성에게 강제하는 여러가지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영화로선, 남성 감독의 영화로선 드물게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 <야행>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야기의 인습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촬영과 편집과 음향 등으로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김수용 감독은 촬영이나 편집 등이 대사 못지 않은 ‘언어’ 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야행>은 “한국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는 김수용 감독의 별명이나, 한국영화의 형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글/박은영

<할레드> Khaled

캐나다, 2001년, 85분

감독 아쉬갈 마섬바기, 오후8시 메가박스5관

더 이상 엄마의 죽음을 숨길 수가 없게 된 상황을 맞은 할레드는 현관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집 안을 떠나지 않는 ‘농성’전에 돌입한다. 간략한 표현과 직설적인 화법을 갖춘 <할레드>는 현대 도시라는 곳이 꼬마 아이 혼자 살기에 얼마나 위협적인 요소로 가득찼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도시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소년의 씩씩한 삶을 그리는 영화. 주인공 할레드는 토론토의 빈민 지역에서 병약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10살 짜리 꼬마. 별 다른 일을 가지지 못한 엄마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어려운 살림을 꾸리지만, 할레드는 엄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또 할레드는 자신과 엄마를 모욕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대견한 아이다. 모로코 출신 아빠와 캐나다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탓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는 할레드는 학교에선 놀림감이 되기 일쑤지만,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한 백인 아이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켜낸다. 그는 엄마를 넘보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또한 눈총을 쏘아붙이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병에 시달리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 죽음의 세계가 낯설기만 한 할레드는 엄마의 시체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집을 나서 학교로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할레드는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게 되지만, 사회보호기관에 홀로 맡겨질 게 두려워 어머니의 죽음을 남들에게 숨기기로 결심한다. 평상시처럼 생활하며 엄마의 죽음을 덮으려는 할레드의 소망과 달리, 주위 사람들은 할레드 집 안에서 나는 괴이한 악취를 궁금해 하며 자꾸만 그의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 수상쩍은 기운을 느낀 사회복지사는 매일같이 그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악독한 집 주인은 집세가 밀렸다며 엄마를 보자고 한다. 결국 더 이상 엄마의 죽음을 숨길 수가 없게 된 상황을 맞은 할레드는 현관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집 안을 떠나지 않는 ‘농성’전에 돌입한다. 간략한 표현과 직설적인 화법을 갖춘 <할레드>는 현대 도시라는 곳이 꼬마 아이 혼자 살기에 얼마나 위협적인 요소로 가득찼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글/문석

<모번 켈러의 여행> Morven Callar

월드 시네마/영국/2002년/97분/감독 린 램지

오후2시 부산극장 2관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지리멸렬한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발판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모번 켈러의 여행>은 한 평범한 소녀의 깜찍하고 당돌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한) 심리적 여행기다. 대담하지만 부드럽고, 부드럽지만 감성적이지 않은 영상이 스토리와 잘 어우러져 있다.

크리스마스 아침, 모번 켈러의 남자친구가 싸늘히 식은 시체로 발견됐다. 남자친구의 시체 너머엔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그가 생전에 쓴 소설 원고가 보인다. 남자 친구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까, 축하해야 할까. 모번 켈러의 선택은? 그녀는 남자친구의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시작한다. 남자 친구의 시체는 토막 내서 매장하고, 사람들에겐 그가 떠났다고 말한다. ‘너를 위해 썼다’는 소설엔 자기 이름을 달아 출판사로 보내고, 그의 은행 잔고를 털어 여자친구와 남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낯선 남자들과의 음주 그리고 섹스. 친구와 다툰 뒤 홀로 남은 모번 켈러는 런던의 출판업자와 만나 차기작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혹 신문 사회면에서, 또는 9시 뉴스에서 모번 켈러의 이러한 행로를 묘사한다면, ‘천인공노할’ ‘파렴치한’ ‘엽기적인’ 등등의 수식어가 동원되지 않을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번 켈러에겐 큰 잘못이 없다. 남자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자기 창작물을 분명 모번 켈러에게 바친다고 했다.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지리멸렬한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발판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평범한 소녀가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비전형적으로 행동하는 것 뿐"이라는 감독 린 램지의 ‘변호’ 그대로, <모번 켈러의 여행>은 한 평범한 소녀의 깜찍하고 당돌하고 (초현실적이기도 한) 심리적 여행기다. 대담하지만 부드럽고, 부드럽지만 감성적이지 않은 영상이 스토리와 잘 어우러져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촉망받는 시네아스트 린 램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신비로운 예지자로 출연했던 사만사 모튼이 모번 켈러로 분해 열연하고 있다.

글/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