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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죽음 위에 핀 버섯에 자비를, 안시환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미세리코르디아>라는 제목이 자비를 의미한다고 해서 자비를 영화의 최종 종착지로 여겨서는 안된다. 제목에는 ‘자비’라는 단어를 내걸었지만 영화에서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무상의 사랑’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지된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넘어서는 에너지”라던 질 들뢰즈의 지적처럼, <미세리코르디아>가 이야기하는 자비는 선규정된 어떤 개념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언제나 현재형으로 흘러넘치는 유동의 힘, 그럼으로써 정태적인 도덕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그 경계를 확장하려는 에너지에 가깝다. 끝없는 유동적 움직임과 생성의 에너지, 그것이 알랭 기로디가 추구하는 욕망이자 자비의 모습이다. 그 자비의 힘에 의해서만 죽어 있는 공동체가 다시 부활할 터이니.

버섯을 먹어야만 하는 삶

영화의 도입부, 제레미(펠릭스 키실)는 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그를 부른 것은 어린 시절 제빵 스승이자 유사 아버지였던 장피에르의 죽음이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이 죽음은 영화의 도발적 주제를 전개하기 위한 일종의 대전제다. 죽어 있는 것은 장피에르만이 아니다. 이 죽음을 마주하기 전, 우리는 제레미의 귀환 과정을 통해 정태적이고 고립된 마을의 모습을 목격한다.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마을 공동체의 모습. 이후에도 우리는 이 인상 이상의 모습을 마을 공동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이 신부 필리프(자크 드블레)가 추도사에서 ‘공동체를 중재’해달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마을에 머물기로 한 제레미는 장피에르의 옷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즉, 장피에르의 옷을 입은 제레미가 그를 ‘대신해’ 마을을 중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은 아버지의 옷을 입은 제레미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 이때 중재는 어지럽힌다는 것, 또는 사건을 만든다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만약 제레미가 영화에 없다고 가정해보자. 거리에 사람 하나 지나지 않는 마을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업한 빵집과 무기력한 왈테르(다비드 아얄라)의 삶으로 대변되는 모습, 그것이 마을 공동체의 전부다. 제레미만 유일하게 여기저기 몸을 옮기며 마을을 어지럽히며 파장을 만든다. 그렇게 장피에르/제레미는 신부의 요청에 화답한다.

제레미가 장피에르의 대리자로서 뱅상을 죽였을 때, 그 시신 옆으로 쓰러져 있는 커다란 고목이 보인다. 뱅상이 묻혀 있는 장소를 다시 찾은 제레미는 그의 시체 위에 자란 곰보버섯을 발견한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뱅상의 시신 위에서 자라난 버섯을 제레미, 마르틴(카트린 프로), 필리프가 함께 나눠 먹는 식사 장면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마르틴은 맛있게, 모든 것을 무상의 사랑으로 받아들인 필리프는 기꺼이(또는 천연덕스럽게), 죄의식에 시달리는 제레미는 눈을 질근 감고 버섯을 씹는다. 결국 <미세리코르디아>가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이 버섯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 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과 악의 도덕적 잣대는 폭력도, 살인도, 거리의 무관심한 죽음도 제거하지 못한다. 이는 (필리프의 말을 빌리자면) 망해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 증명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학살이 난무하는 폭력적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게다가 그 잣대는 공동체의 죽음도 막지 못한다. 또는 공동체를 ‘유사 죽음’의 상태로 내몬다(제레미가 장피에르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했음을 상기하라). 버섯은 잔혹하고 폭력적이고, 그렇기에 비도덕적인 것들을 남몰래 매장한 그 자리에서 쑥쑥 자라는 욕망의 물질적 형상이다. 묻어버린다고 끝나지 않는다. 제레미가 스승의 장례를 핑계 삼아 마을에 돌아온 것, 그리고 떠나지 않고 그 마을에 머무는 것, 심지어는 뱅상을 매장한 그 자리를 매일같이 맴도는 것처럼 말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묻어버린 그 자리에서 매일같이 고개를 치켜드는 버섯을 요리해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필리프는 그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무상의 사랑, 즉 자비라고 말한다. ‘기꺼이’라는 태도로 그 잔혹한 욕망의 징표인 버섯을 천연덕스럽게 먹을 수 있는 삶.

기꺼이, 또는 감히, 긍정하는 삶

<미세리코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신부 필리프의 나신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일 것이다. 나는 <미세리코르디아>에서 발기된 성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다. 그것이 제리미를 구하려는 연기의 결과인지, 아니면 제레미를 향한 육체적 욕망의 징표인지 말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실이든,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에게조차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그러니까 무상의 사랑을 주장한 자신의 말을 육체적 발기로서 증명, 또는 실천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필리프는 <박쥐>(감독 박찬욱, 2008)의 신부 상현(송강호)과 ‘정반대의 육체적 반응’으로 신부로서의 지위를 기꺼이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신의 믿음을 구현하려 한다. 상현이 벌인 강간이라는 극단적 행위는 일종의 연기였다. 발기되지 않은 성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필리프는 그 반대다. 그는 육체적으로 발기된 모습으로 자비를 실천(또는 증명)한다. 여기서 육체적이라는 것은 날것으로서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육체적인 것,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욕망이야말로 죽어 있는 공동체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필리프가 그 파괴적 결과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그 욕망을 세상 밖으로 내보이는 이 유다.

필리프와 제레미 사이에 이루어진 욕망의 공모는 이내 제레미와 마르틴 사이로 전염된다. 제레미는 죽은 장피에르를 대신해 마르틴의 옆자리에 눕는다. 죽어 있던 장피에르가 놓였던 바로 그 침대 말이다. 제레미의 이 행동은 자신을 향하는 의혹을 무마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필리프의 믿음을 실천하는 것일까? 또는 마르틴이 장피에르를 대신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레미가 장피에르를 대신하는 것일까? 혹은 두 사람 모두 온전한 제레미와 마르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려 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확답할 수 없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렇게 ‘욕망의 공모’가 시작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때로 기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욕망의 공모(전염)는 삶의 에너지를 유동하게 하고, 다시 심장을 뛰게 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긍정하기 위한 출발선상에 서도록 한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감히, 또는 기꺼이, 그 자리에 설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