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인연’이란 단어를 입에 자주 올린다.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사람끼리의 관계를 일컫는 사전적 의미 너머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안과 밖의 연결로서의 인(因)과 연(緣)을 생각한다. 영화에도 인연이 있다. 어떤 영화인지 설명하는 내적분석만큼 중요한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영화를 접했는지, 바깥으로부터의 연결 과정이다. 어떤 이유로 그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고, 어떤 상영관에서 언제 관람을 하고, 보고 나와서 피어난 생각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는 맥락들. 얽혀서 다다르는 경로가 결국 영화와 나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지난 4월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셨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콘클라베>가 떠올랐다. 곧이어 <씨네21> 1497호에 구본석 신부님이 써주신 <콘클라베>에 관한 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가 생각이 났다. 신부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글을 통해 또 다른 영화 <요한 23세>(2002)의 존재를 알았다. 덕분에 ‘착한 교황’으로 불렸던 요한 23세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요한 23세>를 뒤늦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두 성인의 행적이 시간을 건너뛰어 마치 필연인 양 인과 연으로 맺어져 있다고 느낀다. 그 연의 실오라기 한 가닥이 내게도 닿았다. <콘클라베> 덕분에, 그리고 구본석 신부님의 글 덕분에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 진실의 조각들이 발맞춰 왔다. 문을 열어주었다. <요한 23세>는 그저 성실한 다큐멘터리다. 카메라는 과장과 미화를 걷어내고 ‘요한 23세’의 행적을 차근차근 정리하려 애쓴다. 카메라는 무엇을 찍고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문득 각자의 관점으로 그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을 전하려 했던 대가들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장뤼크 고다르 감독은 “세상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고 했다. 그리하여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영화는 무엇이 프레임 안에 있고, 무엇이 프레임 밖에 있는지의 문제”라 했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도 문득 떠오른다. 프레임 안과 바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선택과 배제의 이분법이 아니다. 안을 찍음으로써 바깥의 존재가 인지되고, 보이는 것을 찍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카메라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이 이어진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상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좋겠다.
때론 카메라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한다.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지난 계엄과 탄핵 정국의 혼란 속에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기어이 길을 만들어낸 카메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탄핵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들은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다양한 목소리와 시선들이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도 여러 다큐멘터리스트,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엄중한 역사의 진실들이 쉽게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고군분투 중이다. 그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 우리는 그들을 기록하려 한다. (한강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빛과 실로. 카메라와 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