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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짧은 영화, 긴 이야기

지난해 9월경 STORY UP SHORTS 상영회에서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2022 년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잠시 우리 곁을 떠나간 후, 한동안 단편영화를 접할 창구가 마땅치 않았던 터라 오랜만에 접한 작품 한편 한편이 신선하고 행복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작품, 이종훈 감독의 <건축가 A>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2023년 가톨릭영화제 대상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작품이니, 2024년 9월에 와서 이 작품을 좋다고 떠드는 건 영화잡지 편집장으로서 게으름을 고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추천하며 호들갑을 떨고 싶을 만큼 좋았다. 2024년 봤던 영화 목록을 전부 되돌아봐도 가장 오래, 마음 귀퉁이에 따뜻하게 둥지를 튼 한편이었다.

건축가 A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바탕으로 집을 짓는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기억을 재료 삼아 의뢰인에게 딱 맞는 집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전개는 익숙하고 상투적이다. 의뢰인 할머니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짓는 과정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내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는 동화 같은 이야기. 영화에는 신기한 법칙이 있다. 스토리가 범상하고 익숙할수록 다른 표현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린다. ‘기억을 재료 삼아 집을 짓는다’는 문장을 있는 그대로 옮긴 애니메이션의 힘은 길지 않은 시간의 선율 위에서 더 자유롭게 상상할 자유를 얻는다. 짧기에 더 깊숙이 와닿는 마법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우울과 회의에 사로잡혔던 이번주, 두개의 글귀가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다. 하나는 내성적인 작가의 에세이집에 실린 “말을 할 때는 누군가의 가슴에 꽃을 심는다는 마음으로”라는 (SNS에서 마주한) 한줄 잠언, 다른 하나는 “행복이란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라는 모델 홍진경의 행복론이었다. 엉뚱하지만 이 두 문장을 연달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건축가 A>였다.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보니 짧아서 더 따스했던 단편애니메이션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당신의 가슴에 꽃을 심는다는 마음으로 한마디 한마디 곱게 단어를 고르면, 오늘은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누울 수 있을까.

단편영화의 매혹과 가능성은 바로 이런 ‘사이’와 ‘행간’에 깃든다. 단편은 그저 물리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짧게 한정된 호흡이기에 허락되는 미지의 가능성, 그것을 담아낸 유일한 형식들이야말로 단편영화의 본질이다. 올해부터 잠시 쉬었던 미쟝센단편영화제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짧지만 깊은, 작고 소중하기에 더 거대해질 수 있는 영화들의 보금자리는 잠시 숨 고르기를 마치고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이다. 올해 <씨네21>은 이에 발맞춰 단편영화에 대한 인식의 울타리를 더듬고, 소중한 흔적을 수집하는 작업을 수행코자 한다. 일련의 기록들이 쌓여 하나의 궤적을 이룰 때 우리는 마침내 한국 단편영화의 부활과 비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창했다. 그저 <건축가 A> 같은 영화를 더 자주, 더 많이,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옆자리에 <씨네21>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