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는 영웅도 주인공도 없다. 강물 위에 여객기를 비상착륙시켜 수많은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낸 비행기 기장(톰 행크스)이 나오기는 하지만, 막상 영화에 비친 그의 모습은 복잡한 소송과 주택담보대출로 골머리를 앓는 삶에 찌든 평범한 생활인이다. 대신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은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채로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는 보통 사람들, 무수한 ‘우리들’이다. 위험천만의 대형 사고에서 한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기적은 이들 덕분에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미국 찬가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찬가로 읽힐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또 더 지혜로워지게 만들고 거기에서 느슨한 합의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유능한 지도자는 필요하지만, 이 비뚤어진 세상을 자기가 나서서 한번에 ‘바로잡겠다’는 ‘백마 탄 초인’ 따위는 별로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니체나 레닌과 같은 비범한 인물들에게는 경멸의 대상, 나아가 타도의 대상이 된다. 이들이 보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정작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큰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스머프 같은 자잘한 인간들만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요란하게 재잘거릴 뿐이다. 그래서 혁명적, 급진적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기를 원하는 극우파와 극좌파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공유하는 경멸과 혐오를 보면 서로 놀랄 정도로 닮아 있다. 나치의 정치 사상가 카를 슈미트는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을 높게 찬양하며, 다시 오늘날의 수많은 ‘좌파’ 이론가들은 카를 슈미트를 사상적 영감으로 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윤석열씨가 대통령 후보 시절 자주 시전했던 어퍼컷 모션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모든 후보가 선거운동에서 하게 마련인 쇼맨십의 재롱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체포당하기 직전 육필로 남겨놓은 장문의 편지를 보니 전혀 생각이 달라지고 소름까지 끼친다. 그는 정말로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로 가고 있으며, 그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비상대권을 손에 쥔 자신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이 어퍼컷 한방으로 이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초인’이라는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며, 지난해 12월3일 밤 휘둘러진 그의 ‘어퍼컷’ 한방에 멀쩡하던 대한민국이 지금 그로기 상태에 몰려 있는 셈이다. 더욱 황당한 일은 적지 않은 수의 국민들이 여기에 열광하면서 윤석열 개인의 망상을 자신들 전체의 집단적 판타지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에서 시작하여 온갖 풀기 어려운 난제들과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여기에서 스머프들의 말잔치인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 뾰족한 답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지치고 좌절한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쾌도난마로 풀어줄 시원한 한방의 판타지에 빠져들 것이며, 이에 부응하여 자신의 어퍼컷 실력을 뽐내려고 하는 이들도 계속 나올 것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 자꾸 생각난다. 보통 사람들인 ‘우리들’은 힘이 세다. 이 힘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활용하도록 민주주의가 작동하기만 하면, 슈퍼히어로 따위가 없어도 여객기 승객들을 모조리 구출하는 기적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어쩌면 판타지요 망상일까. 하지만 나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