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장미’가 좋다. 설령 그것이 순수한 악의를 포장하고 있을지언정 그 형식만큼은 옹호하고 싶을 정도로.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의 슬픔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결의로 드러낸다는 것이 감동적이지 않은가? 물론 누군가의 냉소와 조소까지 예측하며 비장해지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우스꽝스러워질 확률을 미처 계산하지 못하는 것까지가 비장함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나는 늘 ‘쿨’하면서도 비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쿨’과 ‘비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시간의 축에 발을 붙인 인간이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터. 휴대폰도 자동차도 ‘경량’이 우수한 것이라 입 모아 말하던 시대는 ‘쿨’의 영역으로 등을 떠밀며 나를 비장한 것들과 생이별시켰다. ‘비장미’의 결정체인 《Rising Sun》을 발매한 후 20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듣게 된 것 역시 바로 그 선택 때문이었다.
‘이제껏 <Rising Sun(순수)>도 안 듣고 K팝을 논한 거냐’며 호통을 쳐도 잠자코 듣고 있겠다. 2005년의 나는 동방신기가 이상했다. 데뷔곡인 <HUG(포옹)>는 좋아했다. 귀여운 남자애들이 하루만 네 방에 아기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하는 건 보편적인 수동형 판타지니까. 근데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왜 그 소년들은 갑자기 외계 전투 종족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인가? 댄스가수인데 왜 메탈 록밴드처럼 지구 밖으로 샤우팅을 한 거냐고. 나는 그 급격한 변화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변화한 모습은 극소수의 팬들만이 반응할 만한 것이라 생각했다. 인기에 서열을 매기자면 12위 정도가 알맞은 개성파 헤비메탈 아이돌. 그러나 동방신기는 해괴한 차림으로 가릴 수 없는 ‘비주얼 쇼크’와 기세를 앞세워 당대 최고의 아이돌로 군림했다. 12위라는 순위도 감지덕지한 컨셉을 1위에 올려놓다니. 나는 이수만 프로듀서와 세상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음악으로 시대를 감각하는 내면의 연표가 있다면, 내 것에는 동방신기가 장악한 몇년간의 시절이 하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원인이 불분명한 거부감으로 인해 그들의 전성기를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Rising Sun(순수)>이란 곡을 20년이나 묵혀 모시듯 듣고 있으니 꽤 괜찮은 단절이지 않은가? <Rising Sun(순수)>은 팬덤의 에너지를 걷어냈을 때 비로소 더 또렷하게 들리는 K팝 중 하나다.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펄 레드’ 풍선이 수호하는 이 K팝 앤섬(Anthem)은 박물관의 가장 깊고 조용한 전시관에서 웅장한 뼈대를 하나씩 관찰하듯 들을 때 더욱 새로워진다.
<Rising Sun(순수)>. 제목부터 비범하다. <Rising Sun>인데 따라붙은 괄호 안에 ‘순수’가 있다니. 도대체 일출과 순수함을 괄호까지 써가며 연결하는 이유가 뭘까? 대충 비슷하게 만들어보자면 <레인보우(고통)>, <밀키웨이(연민)> 같은 것인데 이런 직관을 강요하는 것이 몹시 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제목에서 압도된 마음은 노래가 시작되면서 점점 큰 고통으로 변한다. “하늘을 향해 간 나의 눈물로 만든 비가 대지에 내려도 세월에 박힌 내 아픔을 씻어가도 (중략) 용서 내겐 절대적인 사치.” 행끼리 잘 연결되지 않는 가사들은 마치 듣는 이의 참회를 요구하기 위해 형벌에 관한 성경 구절을 짜깁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Rising Sun(순수)>의 장르는 최소 세 가지 형식의 음악이 추가된 얼터너티브 록이다. 1절은 교회 오페라로 시작한다. 믹키유천이 성 밖의 죄인들을 향해 “참회하라! 반성하라!”를 외치며 뒤이어 유노윤호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와 “아직 지치면 안된다!”며 멱살을 잡아 흔든다. 눈에 별이 보일 때쯤 막이 바뀌고 이번엔 담벼락에 앉은 시아준수가 가련한 목소리로 기도를 한다. ‘힘을 잃어버린 날개… 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날들….’ 그리고 그가 올려다본 하늘 위로 영웅재중이 메시아처럼 등장해 큰 소리로 일갈한다. “영원에 남겨진 나를 찾는가아아아아아아!” 각 멤버가 맡은 파트마다 성스러운 심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메시아의 샤우팅 이후 노래는 투쟁가로 급변한다. “나를 닮아 가슴 안에 가득 차 커져가는 innocent 불꽃은 밝게 타오르게 마지막이 찬란한 노을처럼.” 일출을 말했다가 노을을 말했다가 해를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이 대목은 어떤 혁명의 노래보다도 가슴을 붉게 만든다. 그렇게 투쟁심이 절정에 도달할 때쯤 노래는 돌연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다는 듯 혼돈의 끝을 찾아 헤맨다. 그 독백은 이국적인 타악기와 빨라진 비트 덕분에 마치 세상의 재앙을 극복하려는 어느 부족의 기도 같다. 망토를 벗은 주술사 최강창민이 세상 모든 액운을 물리치듯 “라이징써어어어어어어언!” 하고 비명을 지르면 끝없이 분열하던 노래 속 자아가 폭발하듯 소멸한다.
듣는 것만으로 이렇게 식은땀이 흐르는 노래가 또 있을까? 나는 마치 악몽을 꾸듯이 이 노래를 듣고, 들을 때마다 약간의 우스꽝스러움을 겸비한 비장미에 감격하고 만다. 기도하고, 저주하고, 중얼거리다, 절규하는 노래. 무수히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 세상 모든 죄인을 데려다놓고 무릎을 꿇게 하는 노래.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하늘에 외쳐도 아무런 대답 없이 참회를 강요하는 노래. 동방신기의 지난 시간들이 포개져 결국 K팝과 K팝이 떠안고 있는 모든죄를 은유하게 된 슬픔의 노래.
K팝을 ‘듣는 음악’으로 소비하자는 나의 비겁한 구호는 찬양, 투쟁, 주술이 깃든 <Rising Sun(순수)>을 통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기획사와 아티스트간의 불공정한 계약, 수많은 르포에 등장했던 통제되지 않는 ‘사생팬’들, 전 멤버의 성폭행 혐의로 실추된 명예, 거대한 팬덤이 움직이며 만드는 증오와 편견까지. 그들의 역사에 자리 잡은 굴곡이 곧 K팝 팬들의 분노이자 수치이기에 <Rising Sun(순수)>의 비장한 꾸짖음은 그 시간을 경험한 모든 이들의 마음을 향하게 된 것이다.
<Rising Sun(순수)>이라는 노래에 축적된 역사를 말하지 않고 광장을 가득 메운 응원 봉의 불빛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질문에 광장의 사람들이 답했다. 빛이 어떤 절망을 감추고 있는지 숨기면서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응원 봉이 만드는 낙관에 균열을 내는 이런 말들을 한참 흘겨보다가 <Rising Sun(순수)>을 들으며 천천히 참회했다. 인생은 마치 끝없는 궤도를 달리는 별처럼 수많은 질문과 해답을 찾아 미완성의 그림을 그려가는 것. 연대란 결코 완전무결하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과 답변으로 지속하는 것. 20년간 비어 있던 동방신기라는 연표의 여백이 지금, 광장을 가득 메운 ‘빠순이’ 대오를 통해 채워지고 있다.